영화제에서 영화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류지윤의 클로즈업]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10.16 08:31  수정 2026.10.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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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들)’ 여파, 부산까지

부산에서 칸·베니스까지…영화제가 마주한 사회적 논쟁과 창작자의 책임

같은 장면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대중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성과 뒤에 가려진 이야기부터 익숙한 관행, 변화 속에서 불거지는 논쟁까지. [클로즈업]은 쉽게 지나쳤던 맥락을 짚고, 당연하게 여겼던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봅니다. 하나의 정답보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암살자(들)’은 감독과 배우들의 공식 일정이 취소되며 관객과 만날 기회를 잃었지만, 가장 뜨거운 화제작 중 하나였다. 작품을 둘러싼 논란은 영화제 곳곳으로 번졌고, 정작 당사자들이 없는 자리에서 역사적 사실과 창작의 자유, 영화인의 책임에 관한 질문이 잇따랐다.


‘암살자(들)’은 고(故)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개봉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건의 배후로 묘사했다는 역사 왜곡 의혹이 제기됐다.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며 비판했고, 영화계에서는 정치권의 개입이 창작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작품을 평가하는 데서 시작된 논쟁은 정치권과 영화계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낮과 밤은 서로에게’ 기자회견, 장이머우 감독, 정주리 감독ⓒ데일리안 방규현 기자

여파는 부산국제영화제 일정에도 미쳤다. 이민호의 ‘액터스 하우스’를 비롯해 허진호 감독과 출연진의 야외 무대인사가 취소됐고, 유해진과 이민호 등의 개막식 참석도 무산됐다. 유해진은 부산에서 열린 제35회 부일영화상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당시 제작사 측은 촬영 일정을 이유로 설명했다.


공식 일정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논쟁은 계속됐다. 지난 6일 개막작 ‘낮과 밤은 서로에게’ 기자회견에서는 ‘암살자(들)’ 논란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해당 작품에 특별출연한 심은경과 개막작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에게 향한 물음이었다.


답변에 앞서 모더레이터를 맡은 정지혜 프로그래머가 개입했다. 개막작에 집중하고 싶다며 양해를 구한 뒤, ‘암살자(들)’과 관련해서는 영화제 측의 기존 공지를 참고해 달라고 설명했다. 심은경과 김 감독의 별도 답변 없이 기자회견은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이튿날 경쟁부문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는 화두가 창작자의 책임으로 옮겨갔다. 역사적 사실과 창작의 자유 사이에서 영화가 취해야 할 태도를 묻는 질문이었다. 장이머우 감독은 “창작은 창작이라고 생각한다”며 역사적 진실도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정주리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위축된다”고 털어놨다.


두 기자회견은 같은 논란에서 출발했지만 질문 대상과 맥락은 달랐다. 개막작 기자회견에서는 논란에 연관된 배우와 감독에게 견해를 물었고,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창작자의 태도에 초점을 맞췄다. 어느 쪽이 더 적절했는지 가릴 문제는 아니다. 영화제 전체를 뒤흔든 현안인 만큼 관련 질문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개별 작품에 집중하려는 영화제 측의 취지도 이해할 만했다.


논쟁은 기자회견장 밖에서도 이어졌다. 지난 8일 정지영·이명세·김홍준 감독 등 영화인 20여 명은 부산 해운대 이벤트광장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영화를 정치적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며 작품 비판이 감독과 배우, 제작사, 영화제에 대한 압박으로 번지는 상황을 우려했다. 영화의 의미를 판단할 권리는 정치권이 아닌 관객에게 있다는 주장도 내놨다.



지난 8일 부산 해운대 이벤트광장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논란 관련 영화인 긴급 기자회견.ⓒ영화인연대

영화제에서 영화 밖의 문제가 화두에 오르는 일은 부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2024년 칸영화제에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정치·사회적 논쟁보다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프랑스 영화계의 미투 운동과 가자지구 전쟁 등이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칸도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2025년 베니스영화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됐다. 심사위원장 알렉산더 페인은 가자지구 문제에 대한 영화계의 대응을 묻는 질문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자신은 영화를 심사하기 위해 참석했으며, 충분히 생각한 뒤 답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적 갈등의 한복판에 놓인다. 이를 소개하고 평가하는 영화제도 논쟁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창작자가 자신과 무관한 현안까지 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질문할 자유만큼 답변을 유보할 자유도 존중받아야 한다.


기자에게 질문은 취재의 본분이다. 불편하다는 이유로 물음을 삼갈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질문할 권리가 답변을 강제할 권리까지 뜻하지는 않는다.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도 답할지, 어디까지 말할지 선택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영화제는 그 사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개별 작품의 기자회견은 본래 취지를 존중하되, 영화제 전체에 영향을 미친 논란은 주최 측이 설명할 기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즉각적인 답을 내놓기 어렵더라도 쟁점을 확인하고 의견을 나눌 창구는 열어둬야 한다.


중립성이 반드시 침묵을 뜻하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공존할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영화제의 역할이다. 논쟁을 받아들이는 것과 특정 입장을 지지하는 것은 다르다.


‘암살자(들)’의 역사 왜곡 의혹도 비판과 반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창작의 자유를 내세워 역사적 해석에 문제를 제기할 권리까지 막을 수는 없다. 반대로 논란을 이유로 관객의 관람 기회나 창작자의 발언권을 위축시켜서도 안 된다. 비판과 창작의 자유는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제에서 영화만 이야기하고 싶다는 바람은 이해할 수 있다. 논란이 작품을 가리는 상황도 경계할 만하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와 단절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와 정치, 시대의 갈등을 스크린에 옮기는 순간 관객의 해석과 비판이 뒤따른다.


영화제에서 영화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영화제는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를 넘어 산업의 현실과 미래를 논하고, 과거를 돌아보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제가 지켜야 할 것은 논쟁 없는 평온함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가 공존할 수 있는 자리다. 영화만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영화가 그만큼 세상과 가까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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