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L, 방송사 ‘갑’의 시대 끝…이제는 맞춤·AI 경쟁
드라마 시청 문화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OTT 영향력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이 요인만으로는 현재의 변화를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릴스 등 온라인 콘텐츠가 생활화되면서 ‘본방 사수’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시청자는 더 이상 드라마를 기다려 보는 대신, 숏폼과 클립에서 원하는 장면만 골라 소비한다.
ⓒAI로 노출된 삼성 비스포그 러그
시청 문화의 변화는 PPL(product placement) 전략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드라마 전체를 봐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시청자가 원하는 장면만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다 보니, PPL 역시 맥락 없이 드라마 속 특정 장면에 노출해 봐야 효과가 없다. 해당 상품이 나오는 그 짧은 장면조차도 브랜드가 소비되어야 하는 ‘이야기’가 스며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뜬금없이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아니라, 선후배가 고민을 나누는 순간 자연스럽게 커피 브랜드가 등장해야 한다. 해당 장면만 자르더라도 맥락이 이해가 될 수 있게 전략을 짜야 한다.
여기에 인플루언서와 유튜버를 통한 광고 효과가 커진 점도 변화를 가속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맥락 없는 드라마 속 노출보다는, 제품 설명과 사용법까지 친절하게 담아내고 짧은 시간에 수십만·수백만 뷰를 확보할 수 있는 온라인 광고가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드라마 제작사와 방송사의 상황마저 바꿨다. 한때 방송사는 PPL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싫으며 하지 말라” 식으로 조건을 내세웠다. 드라마 송출의 유일한 플랫폼이었기에 가능했다. 이 당시 몇 초 노출에 수천만 원을 책정했지만, 기업들 입장에서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기에 지불했다. 그러나 플랫폼의 다양화와 대중의 거부감, 그리고 기업들의 효율화로 인해 상황은 역전됐다.
한 드라마 제작 PD는 “과거에는 (기업들이 PPL을 위해) 드라마 한 장면에 수억 원을 냈고, (방송사는) 갑의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제작비 상승으로 제작이 어려운데, 기업은 인플루언서나 유튜버를 찾는다. 수백만 원만 줘도 충분한 노출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작사나 방송사 입장에서는 광고주가 온라인으로 눈을 돌리니, (PPL이) 더 간절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이 만족할 수 있게 맞춤형으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비용 역시 방송사마다 가이드라인이 있지만, 기업의 입맛에 맞게 조율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최근 롯데웰푸드와 스튜디오드래곤이 체결한 업무협약(MOU)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처럼 제작 막바지에 제품을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라, 드라마 기획 단계부터 기업과 함께하는 구조다.
작품 콘셉트, 캐릭터 성격, 인물 관계 등을 공유해 제품을 극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맞춤형 전략이다. 제품이 단순 소품을 넘어, 캐릭터의 행동이나 관계 설정과 결합해 브랜드 경험을 만들어, 시청자가 광고임을 인식하지 못할 만큼 매끄럽게 스토리에 스며드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 PPL은 대본과 별개로 후반에 삽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기업이 초기부터 참여하면서 장면 설계에 관여한다. 극적 리얼리티와 광고 효과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구조를 더욱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광고대행사 관계자 역시 "시청자는 홈쇼핑식 멘트보다 브이로그나 관찰 예능 속 자연스러운 순간에 더 큰 친근감을 느낀다. 예능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하는 연예인이 일상 속의 제품을 보여주듯 드라마 PPL도 맥락에 맞게 은밀하고 정교해야 한다. 시청자가 진짜라고 느끼는 순간 브랜드가 흡수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AI를 활용한 PPL도 도입됐다. 2023년 방영된 드라마 ‘마에스트라’에서는 삼성 비스포크 러그와 왁티 SW19 핸드크림이 실제 소품이 아닌 인공지능(AI)으로 삽입됐다. 스타트업 인쇼츠가 개발한 솔루션을 통해 방영 불과 2주 전 촬영본 위에 제품이 추가된 것이다. 기존에는 사전 제작 비중이 늘면서 신제품 노출이 쉽지 않았지만, AI PPL을 통해 시차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올해 4월 개봉한 영화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에서도 AI PPL이 활용됐다. 마동석 주연의 이 작품에서는 보육원 기부 장면의 이삭토스트 단체 주문 박스, 퇴마 사무소 책상 위 테이크아웃 봉투, 조명 소품으로 활용된 뒤태 무드등 등이 실제 촬영 없이 사후 삽입됐다.
AI를 통해 광고주는 최신 캠페인을 상영 일정에 맞춰 유연하게 집행할 수 있고, 제작사는 추가 촬영 없이 새로운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단순 노출을 넘어 장면의 맥락에 맞춘 삽입이 가능해지면서, PPL은 앞으로 기술과 결합해 더욱 똑똑하게 진화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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