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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탐구⑰] 4차원이어서 고마워, ‘보건교사 안은영’ 정유미


입력 2020.10.14 00:00 수정 2020.10.14 11:03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정유미, ‘예상을 빗나가서’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배우

남다른 내용과 형식을 겸비한 이경미 감독 만나 ‘훨훨’

남주혁 손 잡고 신선한 퇴마액션-달달 로맨스 선사

문소리-유태오, ‘비밀’을 가진 자들이 주는 재미도 쏠쏠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 '더 테이블' 스틸컷 ⓒ㈜엣나인필름 제공

배우 정유미를 처음 본 건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에서다. 어디서 이렇게 깨끗하고 맑게 생긴 배우가 나타났을까, 어쩜 이렇게 감정 표현이 섬세할까, 단숨에 사로잡혔다.


실물 정유미를 처음 본 건 영화 ‘좋지 아니한가’(2007)를 즈음해서다. 그 뒤 ‘차우’(2009) ‘도가니’(2011) 등 다양한 영화의 제작보고회나 시사회에서, 또 ‘부산행’(2016)으로 칸국제영화제가 열리는 해변에서 그를 보면서 늘 ‘예상을 빗나가서’ 더 사랑스럽고 특별한 배우라는 생각이 짙어갔다. 스타 배우로 발돋움한 뒤에도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자연스레 오가며 경계를 괘의치 않는 모습도 세간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간 모습이었다.


영화 '좋지 아니한가'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시네마서비스 제공 영화 '좋지 아니한가' 스틸컷 ⓒCJ엔터테인먼트, 시네마서비스 제공

배우 정유미의 예상을 빗나가는 첫 번째는 화면보다 아름다운 얼굴이다. 화면에서보다 더욱 큰 눈망울, 큰 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오뚝한 콧날, 차도르를 차고 자란 것도 아닐 텐데 쇄골에서 쑥 솟아난 것만 같은 기다란 목, 비현실적으로 하얀 피부.


바로 그 얼굴이 바로 또 예상을 벗어나는 두 번째 포인트다. 정유미를 염두에 두지 않고 위의 설명 문구만으로 상상하면 화려하게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눈을 뜨고 정유미의 얼굴을 보면 아름다운 건 같은데 화려하지 않고, 인형 같은 외모임에는 분명한데 맑은 감수성이 깃들어 있다.


영화 '맨홀' 제작보고회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맨홀' 제작보고회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예상을 빗나가는 세 번째 포인트는 언변이다. 똘망똘망 빛나는 눈망울로 말로 야무지게 잘할 것 같은데 정유미는 데뷔 초반부터 말에 서툴렀다. 몇 번을 보다 보니 이유가 보였다. 정유미는 시사회에서든 시상식에서든 ‘의견’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했다. 언론 관련 행사 때 질문이 가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금세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말이 시작되기까지 뜸이 길었고, 겨우 한다는 몇 마디가 “저보다는 옆에 계시는 분이 잘하셨어요” “다 감독님 덕이에요” “영화 예쁘게 봐 주세요” 정도의 단마디였다. 2006년 청룡영화상에서 ‘가족의 탄생’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을 때도 수상 소감을 남긴 게 아니라 전혀 예상을 못 한 듯 당황해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수상의 기쁨을 표출했다.


정유미의 이러한 표현 방식은 배우로서 연기할 때와 똑같다. 배우 정유미는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자신의 해석, 작품이 표방하는 메시지의 주장을 연기하지 않는다. 작품과 캐릭터가 지닌 진심을 ‘누수 없이’, 아니 더욱 풍부하고 섬세하게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런 배우를 만나면 관객은 행복하다. 그 진심을 진심으로 전해 나의 진심을 공명하게 해주는 배우, 흔치 않다.


영화 '그녀들의 방'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그녀들의 방'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연기에도 예상을 벗어나는 포인트가 있다. 요즘에는 일상에서 말하듯 ‘공기 반 소리 반’ 연기하는 배우가 많지만, 예전에는 또렷이 발음하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소리의 비중이 높은 경우가 많았다. 정유미가 상업 장편영화에 등장했던 초반, ‘사랑니’ ‘가족의 탄생’ ‘좋지 아니한가’에서 정유미를 볼 때 그 신선함에 짜릿했다. 예쁜 척 없는 표정도 신선했지만, 발화나 움직임이 더욱 그랬다. 마치 카메라가 없는 상태에서 일상에서 움직이고 얘기하듯, 자연스럽게 말했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짜인 동선을 따르는데 자연스러워 보이게, 능숙하고 유연하게 움직였다는 게 아니라 정말 자유로워 보였다. 모노드라마도 아니고, 주연도 아닌데 저럴 수가 있나. 주눅 들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신예의 모습에 쾌감이 느껴졌다. 일견 영화 ‘넘버3’에서 “아니 불, 땀 한, 무리 당, 불한당”을 역설하던 송강호를 볼 때의 쾌감과 비슷했다. 방금 이 순간 세팅된 이 상황에 맞춰 즉흥연기를 한 듯한 신선도 있는 연기, 그것이 철저히 준비된 것이든 본능에 의한 것이든 관객은 즐겁다.


사실 걱정도 했다. 욕심 많은 관객으로서 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배우를 오래 보고 싶은데 기존에 보아오던 연기 스타일도 아니고, 어떻게든 멋진 말들로 자신을 포장할 줄도 모르니 충분히 배우 정유미를 보여 줄 기회가 없을까 봐 절로 걱정이 싹텄다. 다를 뿐인데 틀린 것으로 오해받을까 봐, 예상을 벗어난 지점들이 ‘4차원’으로 폄하될까 봐 염려했다. 기우였다, 그것도 아주 바보 같은. 대중도, 대중문화 창작자들도 매서운 눈을 가졌고 전문가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정유미는 누구보다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다. 2016년 ‘부산행’으로 칸에 다녀오고 천만 배우가 된 이후 무엇을 해도 박수받고 있다. 영화 ‘염력’(2018)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은 있어도 처음으로 후안무치의 악인을 표현한 정유미의 연기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노희경 작가와 만난 드라마 ‘라이브’(2018)도 ‘연애의 발견’(2014) 이후 오랜만에 드라마 갈증을 풀어 줬다. 시즌2까지 내처 달린 ‘윤식당’, 지난 9월 말 종영한 ‘여름방학’까지 예능을 해도 시청자 눈에서 하트가 솟는다.


그래도 배우 정유미가 빛나는 곳은 스크린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은 정유미 외에 어떠한 대안도 없는 배역이고 작품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 오늘도, 누군가의 일상이고 현실이지만 꺼내기 불편해하는 ‘여성으로서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어려움’에 관한 얘기다. 여성의 눈으로 보면 지나치게 주의, 주장 내세우지 않고 한 편의 영화로서 문화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지나치게 여자 입장만 내세우고, 남자를 죄인으로 몬 것으로 비출 수도 있다. 민감할 수 있으나 꼭 필요한 얘기에 정유미가 나섰고, 배우 정유미의 가장 큰 재능 ‘진심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연기’로 여성만의 얘기가 아닌 사회적 약자에 관한 화두를 우리에게 전했다. 82년생 김지영이 겪은 모든 일은 아니어도 적어도 한둘 이상은 직접 겪었던 숱한 김지영들과 그의 연인과 친구, 가족이 함께 울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광선검 ⓒ넷플릭스 제공 '보건교사 안은영'의 광선검 ⓒ넷플릭스 제공

배우 정유미는 한 편의 영화를 혼자 이끌 힘이 있음을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입증했고, 민낯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이후 다시 한번 타이틀롤을 맡아 배우로서 존재감을 과시 중이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절정의 맛을 보여 주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에서 한 번 더 깊어지지 않고 가볍게 날아서 반갑고, 배우 정유미 특유의 남과 다른 특별함 그대로를 발산하는 캐릭터라 보기에도 즐겁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정유미는 크고 작은 또 좋고 나쁜 의식의 덩어리인 젤리가 보이고 이를 제거하거나 퇴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안은영으로 등장한다. 어려서는 귀신이 보여 괴로웠지만, 이제는 타고난 재능으로 구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고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내며 살고 있다. 남과 다른 생각과 표현력을 지닌 기발한 감독 이경미의 연출작답게 이야기의 발상과 구성, 표현법이 매우 이채로운데 그래서 더욱 배우 정유미에게 안성맞춤이다.


"나는야 보건교사다"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나는야 보건교사다"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한문 선생 홍인표의 할아버지가 창립한 목련고등학교의 보건교사 안은영. 젤리와 보이지 않는 악의 무리로부터 학생들을 지켜내는 힘겨운 미션을 수행하는 안은영에게 주어진 무기는 플라스틱 광선검과 비비탄 총뿐이다. 마음먹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땐, 정말 고약한 상대를 만났을 땐 욕도 한다. 정유미는 천연덕스럽게 광선검을 휘두르고 욕도 툭툭 뱉는데 그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귀엽기 그지없다. 심폐소생 실습용 사람모형을 등에 지고 교실에서 교실로 이동하는 모습, 옴 젤리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가 도저히 못 삼키겠는지 혀를 쑥 내미는 모습, 피도 아니고 김칫국물 흘리며 김치 보쌈을 ‘볼이 터져라’ 우적거리는 모습, 손톱에 봉숭아물 들이겠다고 절구에 꽝꽝 찧는 모습, 배우 정유미가 아니면 누가 이 생경한 풍경과 평범한 일상을 이토록 실감 나고도 사랑스럽게 연기하겠는가.


정유미는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다양한 장르를 연기한다. 젤리 퇴치 초능력자로서는 ‘퇴마 액션’, 보호막을 타고난 남주혁(홍인표 역)의 손을 잡고 좋은 기운 충전할 때면 ‘멜로’, 또 다른 초능력자 문소리(화수 언니 역)와 주거니 받거니 랩 배틀 하듯 대사할 때면 ‘블랙코미디’, 어느 장면 어느 장르에 갖다 놓아도 척척 소화한다. 목련고등학교에는 정말이지 연기 잘하는 배우가 나오고 또 나오는데 캐스팅 잘하고 디렉팅 잘한 이경미 감독의 몫이 크지만, 문소리와 정유미 같은 좋은 선배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도 한몫한다.


"좀 달라도 괜찮아"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좀 달라도 괜찮아" ⓒ넷플릭스 예고편 캡처

‘보건교사’는 3가지가 딱 맞아 떨어진 드라마다. 남과 다른 특성이나 사연을 지닌 사람은 결코 해롭거나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판타지 형식을 빌려 전하는데, 이를 연출하는 사람이 남다른 사고와 스타일을 지닌 이경미 감독이고, 주연이 4차원 세계에서 온 듯 특별한 매력과 자유 연기법을 보여 주는 배우 정유미다. 장차 빌런으로 더욱 커질 영어 원어민 교사 매켄지 역의 유태오 역시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미국에서 공부하고 동남아, 러시아를 거쳐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 중인 남다른 성장사와 이력의 소유자다.


얼마나 기막힌 조합인가. 남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특성과 매력을 십분 살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공평함의 중요성을 남다른 방식으로 알리고 있고, 그 중심에 배우 정유미가 있다. ‘킹덤’에 이어 세계에 한국 드라마를 알릴 ‘보건교사 안은영’, 우물에 가서 숭늉 찾는 마음으로 ‘시즌2’를 기다린다. 평소 자신의 속을 채운 내용이나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개성 넘쳐서, 독특해서, 좀 튀어서 마음고생 했던 이들에게 특별한 위로를 주는 드라마, 그런 안은영을 아직 못 만났다면 놓치지 말자.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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