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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감독탐구⑤] 인간의 색채, 대담한 시선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입력 2020.09.06 15:31 수정 2020.09.06 19:3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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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뮤즈 중 한 사람, 페넬로페 크루즈 ⓒ출처=네이버 영화 '귀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뮤즈 중 한 사람, 페넬로페 크루즈 ⓒ출처=네이버 영화 '귀향'

만일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아야 하고, 단 한 감독의 영화만 가져갈 수 있다면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택할 것이다. 정열적이고 과감한 색채에 눈이 황홀하고, 알모도바르의 ‘짝꿍’ 작곡가 알베르또 이글레시아스의 음악에 귀가 호강하고, 감독 박찬욱처럼 완벽한 미장센 덕에 벽지의 무늬며 쓰레기통 하나까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우리가 흔히 보고 안다고 생각했던 사랑, 내 곁의 어머니와 지구 절반의 여성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는 신선한 접근법에 무릎을 치고 그것에서 연장된 인간과 인간 세상에 관해 그가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느라 뇌가 분주히 움직이는 통에 훨씬 덜 고독할 것이다.


1980년부터 40년 동안, 포털사이트에 소개된 영화만 해도 35편에 달하는 감독의 영화 그리고 그 필모그래피를 관통해 흐르는 거장의 세계를 모두 설명해낼 재주도 지식도 없음에도 ‘감독탐구’ 5번째로 삼은 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마음에서다. 꼭 얘기하고 싶고, 언젠가 다룰 게 분명하다면 지금이다.


색과 구도로 표현된 15년 만에 만난 모녀사이 ⓒ출처=네이버 영화 '하이힐' 색과 구도로 표현된 15년 만에 만난 모녀사이 ⓒ출처=네이버 영화 '하이힐'
다양한 색채와 패턴의 하모니 ⓒ출처=네이버 영화 '키카' 다양한 색채와 패턴의 하모니 ⓒ출처=네이버 영화 '키카'

알모도바르의 색채는 데뷔작 ‘산 정상의 페피, 루시, 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포스터만 봐도 남다르다. 아무 영화나, ‘하이힐’이든 ‘키카’든 ‘나쁜 교육’이든 ‘귀향’의 장면을 떠올려 보면 주인공들의 옷이며 액세서리, 가구며 카펫, 주인공 뒤로 보이는 배경은 물론이고 테이블에 놓인 장식물 하나까지 저마다 원색적이고 개성적인데 전혀 우습지 않게, 대단히 아름답게 어우러지게 하는 힘이 알모도바르에게 있다. 마치 화면 안의 색깔들을 하나의 음표라고 한다면 그 음표들을 지휘해 색채의 향연으로 연출해 내는 마에스트로 같다. 장 폴 고티에, 지아니 베르사체 같은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담당한 의상을 보는 재미는 덤이다. 다른 영화들도 함께했지만, 특히 ‘키카’에서 두 디자이너가 만나 이뤄낸 컬러풀 패션은 인상적이다.


영화 스틸컷 속 갈색 수건 ⓒ출처=네이버 영화 '줄리에타' 영화 스틸컷 속 갈색 수건 ⓒ출처=네이버 영화 '줄리에타'

영화에 등장하는 요소 하나하나에 그가 얼마나 마음을 갖고 대하는지, 마치 사람과의 관계처럼 인연과 운명을 생각하는지 짐작하게 하는 제작일기가 영화 ‘줄리에타’ 개봉 당시 소개된 적 있어 그대로 옮긴다.


“어떤 풍경, 노래나 물건들은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혹은 재발견하거나 물건인 경우 샀을 때부터) 내 영화에서 모습을 보일 거라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런 것들은 참을성 있게 수년간 간직하며 적당한 영화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곤 합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는 란사로테의 검은 해변 풍경이 그러했고, ‘욕망의 낮과 밤’에서는 잠수부가 그러했습니다. 안티아와 베아가 우울한 줄리에타를 닦아주던 갈색 수건도 그렇습니다. 루시안 프러드 전시회의 포스터는 줄리에타가 로렌조와 함께 살 때까지 4년을 기다렸습니다. 줄리에타가 쓰레기통에 버린 파란 봉투를 찾으려고 뒤적일 때, 프러드의 모습이 그런 그녀의 모습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쓰레기통 역시 처음 샀을 때부터 제 작품에 등장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 제가 사용하는 쓰레기통입니다. 바다 그림은 갈리시아의 화가 세와네의 작품입니다. 갈리시아 지역의 집에 실제 그곳의 화가들과 공예사들의 작품을 담길 원했습니다. 세와네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참 큰 행운이었죠. 영화 속 등장하는 타투의 중심은 디스 베를린이 디자인했으며, 안티아가 마드리드 방에서 되찾은 바다 그림 또한 그가 완성해 주었습니다.”


Talk to Her ⓒ출처=네이버 영화 '그녀에게' Talk to Her ⓒ출처=네이버 영화 '그녀에게'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익숙한 것이라 더 낯설고 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때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 자체로 의미 있다. ‘그녀에게’를 보자.


남자 간호사 베니뇨는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다 길 건너 발레학원에서 춤추고 있는 알리샤에게 반한다. 날마다 훔쳐보던 베니뇨는 알리샤가 흘린 지갑을 찾아 주며 인연의 끈을 만든다. 알리샤의 아버지가 정신과 의사이고 집과 의원이 한 곳에 있음을 확인한 베니뇨는 상담을 예약한다. 15년간 집에서 아픈 어머니를 돌봐왔으며 그를 위해 간호사 자격증도 땄노라 말하고 첫 번째 상담을 마친 베니뇨는 집안으로 몰래 들어가 알리샤의 머리핀을 가지고 나온다. 계속해서 발레학원을 응시하지만 보이지 않는 알리샤, 교통사고로 코마 상태에 빠져 입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베니뇨를 전담 간호사로 청한다. 그렇게 시작된 베니뇨의 알리샤 돌보기는 말 그대로 지극정성이다. 엄마가 아이를 돌보듯 건사하고 연인에게 속삭이듯 온갖 일상과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 알리샤가 좋아하는 무용 공연과 흑백영화를 대신 보고 와 감상을 얘기한다.


한 시도 보살핌을 늦추지 않는 베니뇨, 모든 게 어색한 마르코 ⓒ 한 시도 보살핌을 늦추지 않는 베니뇨, 모든 게 어색한 마르코 ⓒ

여행지 기자 마르코는 투우사 리디아와 연인 관계다. 투우 경기 중 사고로 코마에 빠진 리디아 곁을 지키지만, 더이상 사랑을 전하고 느낄 수 없음에 절망해 있다. 그런 마르코에게 베니뇨는 끝없이 말하고 끝없이 어루만지라고 권한다, 리디아가 표현은 못 해도 다 알 수 있을지 모른다면서. 어색해하는 마르코를 도와 베니뇨는 넷이 함께하는 시간을 병원 옥상에서 만들기도 하지만 끝내 마르코는 리디아를 떠난다.


스토킹과도 같은 마음으로 시작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상대를 돌보는 베니뇨, 너무나 사랑했기에 달라진 연인을 받아들이기 힘든 마르코, 어느 게 사랑일까. 알모도바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질문이 좀 더 날카로워진다.


알리샤의 머리핀조차 지닐 수 없는 곳에 갇힌 베니뇨의 절망 ⓒ 알리샤의 머리핀조차 지닐 수 없는 곳에 갇힌 베니뇨의 절망 ⓒ

알리샤를 정성으로 돌보는 베니뇨는 동료 간호사들의 야간 근무 요청을 언제나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다. 알리샤의 임신. 범인으로 지목돼 자백한 베니뇨는 수감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알리샤가 출산을 하고 코마에서 깨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어머니가 없는 알리샤를 세상 그 누구보다 정성으로 보살피고 평생 빠져 있을 수도 있었던 코마에서 벗어나게 했지만, 그것이 사랑일까. 법이라는 잣대를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이것이 사랑이라 불릴 수 있느냐고 감독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보다 더 어려운 건 베니뇨 마음속의 그것, 알리샤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냐는 질문이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답은 할 수 없어도 찾아지는 건 있다. 내 안에서 사랑이라고 느끼는 감정을 진정한 사랑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고심이 숙제로 남는다.


젊은 시절의 하비에르 바르뎀 ⓒ출처=네이버 영화 '라이브 플래쉬' 젊은 시절의 하비에르 바르뎀 ⓒ출처=네이버 영화 '라이브 플래쉬'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배우를 배우로서 빛나게 하는 감독이다. 카르멘 마우라, 페넬로페 크루즈, 빅토리아 아브릴, 마리사 파레데스, 세실라 로스, 로시드 팔마, 프란체스카 네리, 안젤라 몰리나, 아드리아나 우가르테, 엠마 수아레스 등 많은 여자 배우들이 알모도바르의 세계에서 빛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하비에르 바르뎀, 하비에 키마라,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다리오 그란디 네티, 유세비오 폰셀라 등의 남자 배우도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배우들, 페넬로페 크루즈와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예로 들면 설명이 쉬울 듯하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관능미의 대명사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역시 야성미가 철철 흐르는 사내다.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할리우드가 그들이 가진 매력 중 상업적으로 가장 잘 팔릴 특성을 극대화해 반복해 활용한 결과, 우리에게 심어진 대중적 이미지다. 하지만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그들을 만나면 여러 색깔과 여러 얼굴을 지닌, 연기력 뛰어난 배우임을 자각하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연기력이야 부족하지 않으면 되고 두 사람이 가진 이미지가 더욱 중요하지만,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선 여느 배우나 다름없이 연기력이 제일 중요하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에게 그대로 보인다.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속 로사 ⓒ출처=네이버 포스트 '씨네플레이'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속 로사 ⓒ출처=네이버 포스트 '씨네플레이'

페넬로페 크루즈는 ‘하몽 하몽’(1994)으로 데뷔했지만 10대에 겪은 끔찍한 노출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 영화에서 크루즈의 몸이 아니라 연기의 가능성을 본 게 알모도바르였고 ‘라이브 플래쉬’(1999)에 조연으로 처음 캐스팅했다. 버스에서 출산을 하게 되는 여자, 길지 않은 출연에도 호연을 펼쳤고, ‘내 어머니의 모든 것’(2000)으로 이어졌다. 알모도바르에 자주 나오는 세실라 로스가 주연하고, 크루즈가 임신한 수녀 로사를 연기한 이 영화는 칸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고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석권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크루즈에게 평단의 호평, 할리우드 진출을 안겼다.


할리우드에서도 그의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들이 있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만났을 때 페넬로페 크루즈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닌, 몸매만 좋은 게 아닌 연기파 배우가 된다. 아픔을 지닌 딸이자,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가진 엄마로 분한 ‘귀향’, 오드리 헵번부터 마릴린 먼로까지 다양한 색깔의 얼굴이 보이는 ‘브로큰 임브레이스’ 안에 있을 때 편안해 보인다.


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토니오 반데라스 ⓒ출처=네이버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토니오 반데라스 ⓒ출처=네이버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정열의 미로’(1982)부터 보일 만큼 인연이 깊다. 어릴 적 축구를 잘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꿈을 포기한 뒤 우연히 본 연극 ‘헤어’를 통해 관심을 지니게 된 그는 극예술을 공부하고 소극장 연극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에 횡행하던 정치적 검열로 인해 구금을 반복하다가 배우의 꿈을 안고 대도시 마드리드로 향했다. 꿈과 다른 현실, 웨이터나 모델 등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를 발굴한 게 알모도바르였다. 감독은 이후 ‘마타도르’(1986) ‘욕망의 법칙’(1987) 등에 반데라스를 주연으로 기용하며 스페인 영화의 혁신을 거듭했다. 특히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가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반데라스가 영어를 말하지 못하는 채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최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에서는 마치 알모도바르 그 자신이 된 듯 초로의 감독으로 분해 열연했고, 칸국제영화제는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수여했다. 알모도바르 영화 안에서 반데라스는 자유롭고 다채롭다. 지질한 실패자이기도 하고, 질투에 찬 동성애자이기도 하고, 인공피부 개발에 몰두하며 복수를 일삼는 의사이기도 하다. 노출은 기본, 농도 짙은 동성과의 키스도 연기하지만 예술적이다.


촬영장의 페드로 알모도바르(오른쪽) ⓒ출처=네이버 영화 '내가 사는 피부' 촬영장의 페드로 알모도바르(오른쪽) ⓒ출처=네이버 영화 '내가 사는 피부'

유럽 투어는 성당 여행이나 마찬가지라 할 만큼, 그 나라들의 역사와 문화 양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교회는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 흔히 스페인 성당은 가장 나중에 보라고 말한다, 먼저 보면 다른 나라의 성당들이 자칫 시시해 보일 우려가 있다. 규모가 크고 화려한데,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디테일마저 살아 있다. 스페인이 해상강국으로 끌어들였던 세계의 부와 문화가 성당에서 확인된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제국주의의 폐해도 가늠이 되는 순간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보면 스페인 성당이 연상된다. 색채의 마술사가 펼치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아름다움, 작은 소품 하나에까지 마음을 들인 구성요소들, 그리고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들의 인생에 남긴 상처들까지 예술적으로 집약돼 있다. 성당은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어제의 잘못을 조명하고 내일의 희망을 품는다. 여성들의 '빛나는 연대’를 통해 답을 모색한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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