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적들이 발굴됨으로써 BC 1500년경에 머물렀던 인도와
파키스탄 역사의 기원을 BC 3000 년경으로 밀어 올렸다
파키스탄, 길과의 전쟁 (II)
라호르(Lahore)의 이른 아침은 5백만 명이 사는 도시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시골의 뒷골목처럼 조용하다. 아침 산책길에서 드문드문 만나는 이곳 사람들은 무표정하면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본다.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슬쩍 손을 들거나 웃음으로 인사를 보내면 그제야 웃거나 같이 손을 들어 답을 한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도 있지만 쑥스러움이 많은 순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호텔 앞에 트럭이 한 대 서 있다. 네팔이나 인도 그리고 이곳 파키스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트럭으로 화려한 색과 그림, 치장을 한 모습이다. 옛날 대상들은 짐을 싣고 다니던 낙타나 야크에 치장을 하던 풍습이 있었다. 화려한 색을 쓴 것은 멀리서도 눈에 잘 띄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여행길의 안전을 비는 것과 이상향에 대한 기원을 드리며 그들이 믿는 신을 그려 넣기도 했다.
그 모습들이 지금의 트럭이나 버스 등에도 남아 있다. 낙타에 매달던 방울 같은 것들과 낙타의 등을 덮었던 천에 달린 수술 같은 것들이 달려있기도 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도 등에서는 그림의 내용들이 주로 시바 신을 비롯한 신앙에 대한 것들이고 좀 더 화려하다면 회교국가인 파키스탄은 알라라는 유일신을 믿기 때문에 신앙적인 그림이 아니고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들을 그린다는 것이다. 하라파를 찾아가는 오늘부터 나도 대상이 된 느낌으로 저런 트럭들을 쫓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길을 밟을 것이다.
라호르는 수도인 이슬라마바드(Islamabad) 남쪽 약 350km에 위치해 있고 오늘 첫 행선지로 찾아갈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하라파(Harappa)는 라호르 남쪽 약 200Km 조금 넘는 지점에 있다. 따라서 하라파에서 우리들의 최종 목적지가 될 카라코람 하이웨이(KKH) 의 중국 국경 쿤자랍 패스(Khunjaerab Pass)까지는 1,600km이상이 되며 왕복 3,000km가 훨씬 넘을 것이다.
이슬라마바드 남쪽으로는 이 나라 남쪽 끝, 바다가 보이는 옛 수도 카라치(Karachi)까지가 모두 평원이다. 인더스 강을 따라 비옥한 농토를 이루는 이 지점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문명이 싹 튼 곳이다. 인더스문명은 BC 2500년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번영한 고대문명을 말함인데 대표적인 유적지 두 곳이 하라파와 모헨조다로(Mohenjodaro)유적이다.
제2의 도시 라호르 남쪽의 하라파와 제1의 도시 카라치 북구에 있는 모헨조다로는 600km 이상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같은 시기에 조성된 고대문명지들이 지금도 속속 발굴되고 있다. 물론 버스를 하루 이상 타야하기 때문에 가볼 수도 없지만 현재 모헨조다로 유적지는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해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에게는 여행제한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라파로 이동하는 아침, 아직 이른데도 햇살은 강렬하고 따갑다. 시내를 통과하는 차창 밖 풍경은 의외로 활기 넘치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마천루 같은 빌딩 숲은 없지만 군데군데 시장들이 발달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대도시에 숲이 많다는 것은 더위를 반감시키고 청량함을 주는 것 외에도 도시를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그 중 우리나라 버드나무처럼 생긴 아쇼카나무, 제주도에 가로수로 많이 키우는 유도화, 그리고 노랑꽃이 만발한 아카시아나무(우리나라에서는 흰 꽃이 피는 아카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잘못 표현하고 있음)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간간이 배롱나무나 자귀나무도 보인다.
교외로 나가자, 넓고 끝없는 대지 위에는 푸른 작물들로 가득하다. 멀리서 보면 꼭 옥수수나, 수숫대처럼 보이는데 사탕수수 밭이다. 그 밭이랑 사이로 검은 물소 떼가 어슬렁거리다 찻길 위로 들어오기도 하고 노새가 숨을 몰아쉬며 제 몸보다 큰 자루를 싣고 걷기도 한다.
이슬람들이 대부분인 파키스탄에서는 물소뿐만 아니라 소를 먹고 인도에서도 물소는 소가 아니라서 먹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웃고 만다. 아침부터 환각성분이 든 빤을 씹으며 입술이 빨개진 노인네들과 니깝이나 히잡을 쓴 여자들이 드물게 눈에 띈다.
(아프가니스탄 여자들이 쓰며 눈 부위에도 그물망을 대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든 부르카와 달리 파키스탄 여자들이 주로 쓰는 니깝은 검은 천으로 모든 부위를 가리지만 눈 부위는 맨살을 드러낸다는 점이 틀린다.)
중간에 잠시 쉬게 된 곳에서 우리를 알아본 아이들이 길 건너에 떼로 몰려와 고함을 지르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손짓을 한다. 카메라 줌을 당겨 들이대자 갖가지 포즈를 취한다. 때묻지 않고 걱정 하나 없어 보이는 10대들이 천진하다. 그들의 배경이 되어준 건 작은 개천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다이빙하며 자맥질하는 또 다른 아이들이다. 이런 풍경은 내내 여러 곳에서 보게 된다.
하라파까지 200km조금 넘는 거리를 거의 다섯 시간 만에 도착했다. 나중에 가게 될 KKH에 비하면 길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중앙선조차 그어지지 않은 2차선 길을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하였고 중간중간 좁은 길이나 비포장도 더러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의 도로개념은 머릿속에서 비워두기로 했다. 오늘 당장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미치자 그리 답답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적지인 하라파는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햇볕하나 피할 길 없는데 몇 걸음 걷지 않아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10살 박이 조카아이의 얼굴이 이내 빨갛게 익어버린다. 종종걸음으로 발굴지 맨 앞에 위치한 하라파 박물관 그늘로 몸을 피한다.
인더스문명은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를 받았던 하라파 유적의 이름을 따서 고고학적으로는 모헨조다로 유적까지 통 털어 하라파문화라고 부른다. 인더스문명의 범위는 히말라야 산록에서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1600km와 동서로 펀잡(Punjab) 지방을 가로지르는 1100km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다.
하라파 유적은 1856년 영국인 브룬튼 형제가 뮬탄-라호르(Multan-Lahore)간 철도 부설 공사를 하다가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21-1924년, 1926-1934년 사이였으며 2년 후에는 모헨조다로에서도 고고학적 발굴이 착수되었다. 이 유적들이 발굴됨으로써 BC 1500년경에 머물렀던 인도와 파키스탄 역사의 기원을 BC 3000 년경으로 밀어 올렸다.
모헨조다로는 ‘사자(死者)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J. H.마셜에 의해, 후에는 E.매케이에 의해 발굴되었고 하라파는 M. S.바트 등에 의해 발굴되었다. 이후 파키스탄에서는 M. 휠러가 1945년과 1950년에 하라파와 모헨조다로를 발굴했다. 지금까지 찬후다로(chanhu-daro) 등 같은 종류의 문화가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현재까지 총계 100개소 이상의 유적이 보고되고 있다. 조사해온 자료와 거의 같은 내용의 설명을 현지 박물관 관계자가 열심히 설명을 해 준다.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된 작은 박물관에는 하라파 유적에서 출토된 것들과, 일부 모헨조다로의 것들이 소박하게 전시되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와 동일한 년대를 보이는 색을 넣은 엷은 주홍의 채색토기, 흙으로 만든 커다란 솥, 항아리 등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정겹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관심을 끄는 것으로는 돌을 사용해서 무게를 달았던 각종 크고 작은 돌 추, 주사위 등이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상상하게 해주는 것들이라 유심히 쳐다본다. 나중에 탁실라 박물관에서는 동(銅)으로 만든 프라이팬을 보게 되는데 음식을 요즘처럼 취사해 먹었다는 증거가 되는 이런 것들도 당시의 유물들이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인장(印章)종류 들이다. 화폐의 교환가치로도 통용이 되었다고 추정하는 이것들에는 당시의 고유한 글씨와 동물상이 조각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모헨조다로에서만 천 개 이상이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하라파에서 발굴되는 것들도 형태는 비슷하며 인장의 모양은 대개는 사각형인데 둥근 것들도 있다.
이 인장들은 도장 찍기 위해 각인을 한 가락지처럼 사용되었거나 또는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들도 있다. 그러나 똑같은 모양의 인장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5백여 개나 발견된 점으로 보아 이것은 무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아마도 이것들은 상인들의 통행증 역할을 하였거나 혹은 상품의 수령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일반적으로 추측하고 있다.
인장에 조각된 동물로는 물고기가 가장 많지만 범, 물소, 코뿔소, 코끼리 등과 악어와 같은 늪지대의 동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습하고 숲이 많은 환경이었음을 시사해준다. 또한 인장에 새겨진 부호들은 당시의 문자임이 틀림없으나 아직 판독하지 못한다고 한다.
수 십 년은 되었음직한 구형 선풍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지만 그늘이란 점 외에 전혀 땀을 식혀주지 못하는 어두운 박물관을 나오자 키가 큰 현지인들이 How are you?하고 인사를 건넨다. 말은 우르두어를 공식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모든 문서는 영어로 작성하는 이 나라에서 대개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음에 놀란다. 웃으며 악수를 하는데 한마디 튀어나오는 것을 도로 삼킨다. Usually fine, but boiled weather makes me mellowed.
오후 1시가 다 되어 가는 한낮, 40도를 웃도는 유적지를 따라 걷는다. 하라파유적은 공공시설이 있으면서 방어벽들이 조성된 곳, 주거지역, 그리고 곡물저장시설과 공장 터, 후대에 만들어진 모스크의 흔적들, 그리고 파괴되고 남은 흔적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들린 중심AB지구에는 후대에 만들어진 높은 방어벽 안으로 초기유적으로 공동우물과 샤워장이 있던 곳이 뚜렷하게 보인다. 수 백 개의 우물이 발견된 모헨조다로와 달리 이곳에는 8개의 우물만 있는데 공동우물과 개인 우물이 확연히 구분된다고 한다. 시대적으로 초기 유적인 하부구조는 이곳에 살던 하라파 인들이 다시 짓기 위해 스스로 파괴한 것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하라파는 BC 2500년에서부터 그 흔적이 사라지기까지 약 7번의 건축과 파괴가 번갈아 일어났다는 설명을 듣는다. 많은 유물들이 철도건설당시 영국 건설자들에 의해 약탈당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세워진 모든 해설판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에 들른 언덕AB지역은 주거를 위한 지역으로 십자로 구성된 길에 계획적으로 건축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동, 서로는 넓게 조성되어 있고 물이 모이고 빠져나가도록 한 집수공(集水孔)들이 특징적으로 남아있다. 남, 북로는 상대적으로 좁아 이웃집들과 맞닿아 있다. 몇몇 집들에서는 샤워시설이 있고 물이 도시의 중앙 배수로로 빠져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인더스문명 도시의 특징 중의 하나가 상 ·하수도 시설의 발달이라 하는데 눈으로 봄으로써 이의를 달 필요가 없어졌다.
모헨조다로와 더불어 당시부터 가마에서 구어 만든 벽돌을 규격 적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도 특징으로 불 수 있다. 비록 홍수의 범람으로 인하여 상층부 유적들이 파괴되고 지반이 침하되어 지표면보다 낮은 지역의 흔적들만 남아 있지만 흔적처럼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많은 증거들을 보여준다. 구운 벽돌의 사용은 도시의 형성이 질서정연한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리란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곳의 역사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 남긴 또 다른 유산이 존재한다. 언덕AB지역을 통과하면 남, 북 길이 12m의 사원 터가 나오는데 무굴제국 전기에 해당하는 AD 1526- AD 1706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언뜻 보면 기원전의 건물터와 별다르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 사원을 건립할 때 고대 하라파 건물에 사용되었던 벽돌을 옮겨지었기 때문이란다.
이곳을 지나 만나게 되는 언덕“F´지역은 주거지인 언덕AB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교외에 해당하며 BC 2540년 경에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같은 양식으로 지어진 14채의 집들이 있는데 노동자들의 장소라 칭하고 있다. 이런 집들은 부유한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겸한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서쪽에는 금속을 녹이거나 그릇을 굽는 요(窯)들이 있으며 노동자들이 있어 일을 한 지금의 공장과 같은 곳이다. 인접한 북쪽에는 직경 5m 정도의 원형으로 된 연단들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들의 기능은 잘 모른다. 다만 곡물들을 공정처리 하던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곳에서는 그릇류나 붉은 사암으로 만든 남자 형상의 토루소등을 포함한 테라코타 등이 출토되었고 다양한 인장들과 상품을 만들면서 사용한 구리나 동(銅)의 잔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신 흐르는 땀에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던 33살의 노총각인 현지 가이드 ‘주비’에게 더워서 힘들다고 하자 몬순의 영향으로 지난주보다는 훨씬 시원하다는 대답을 한다. 하기야 오늘 아침 TV에서는 인도지역에 홍수가 나서 이재민이 100만 명 넘게 나왔다는 소식을 듣기는 하였다. 그러나 40도를 훨씬 넘기는 한낮 더위는 하라파를 거의 다 봐갈 때쯤에는 정신마저 아득하게 하였다.
그런 와중에 800년 쯤 전에 만들어졌다는 묘지 하나가 들판 가운데 버티고 서 있고 그곳 입구의 작은 문이 만든 그늘에 노인 하나가 무심하게 앉아 우리를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그늘에서 노인의 눈매는 깊고 어두워 허허로이 펼쳐진 하라파 유적처럼 그 표정을 다 읽을 수 없다. 화석처럼 앉은 노인네를 보면서 작은 한기가 돋고 세월도 혀를 내두르며 비켜갈 것처럼 보였다.
돌아 나오는 길, 빠른 걸음은 등 뒤로 땀이 흐르는 느낌 때문에 조심해서 천천히 걷는다. 멀리 작은 숲 건너 개울가에서 얼굴이 새까만 아이 둘이 이방인들을 보고 신기한 듯 소리를 지르고 나무그늘에 앉아있던 남자 아이 둘은 우리를 구경하는 눈치다. 아까 보았던 노인네의 얼굴과 클로즈업 되면서 파키스탄의 유구한 역사만큼 사람들의 표정도 참 다양하다 싶은 생각을 한다.
하라파를 빠져나와 1시간 이상을 달려 찾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우리 역사의 기원이 된다는 단군의 고조선을 생각한다. 중국의 역사서에 고조선이 등장하는 것은 BC7세기경으로 비록 세계의 역사가 인정치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하여도 우리는 수 십 년 전까지 BC 2333년 정도를 건국시기로 보는 단기(檀紀)를 썼었다.
이 시기는 인더스문화가 나타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만들어진 고조선,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를 2000년 쯤 밀어 올릴 수 있음에도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짜파티를 커리소스에 싸서 한 입 먹는다. 마른입 속에서 잘 넘어가지 않아 냉수 한잔 들이키는 뙤약볕 속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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