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 마무리?´…투수는 보직을 타고난다

입력 2007.06.06 11:02  수정

마운드 보직 이동의 ‘희와 비’

투수에게 맞는 보직 맡겨야

‘한국산 핵잠수함’ 김병현은 플로리다 말린스에서 선발투수로 성공적인 발걸음을 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각에서는 ‘김병현이 마무리투수로 활약할 때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고 지동설처럼 믿고 있다.

마무리투수로 정상급 위력을 떨친 것에 대한 향수도 향수지만, 김병현이 불펜에서 더욱 무서운 투수라는 점은 여러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증명된 바 있다. 비단 김병현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적지 않은 투수들이 자신에게 맞는 보직을 찾고 있으며 코칭스태프에서도 투수의 기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보직 맞추기에 애쓰고 있다.



◆ KIA, 마운드 보직 대이동의 결과는?

지난해 한화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승2패로 패퇴한 KIA 서정환 감독은 얼마 후 마운드 대수술을 선언했다. 한기주를 마무리투수로 기용하고, 윤석민을 불펜에서 선발로 돌리는 것이 대수술의 핵심이었다.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계약금 10억 원을 받고 입단한 한기주는 궁극적으로 선발투수로 성장할 유망주였으며, 윤석민은 ‘광주댐’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위기에서 팀을 막아내는 불펜투수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정환 감독은 마운드 수술을 감행하며 올 시즌을 준비했다.

윤석민의 선발 전환은 대성공이다. 사실 불펜에서 150km대 강속구와 140km대 고속 슬라이더로 위력을 떨친 윤석민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구종과 경기운영능력이 필요한 선발투수로는 검증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겨우내 윤석민은 기존 슬라이더에 커브와 체인지업을 레퍼토리에 새로 추가했으며 스태미나 강화에도 힘을 쏟았다.

비록 지독한 불운으로 3승밖에 올리지 못했으나, 방어율(2.16)과 WHIP(1.03)에서 모두 2위에 올라있다. 물 흐르듯 유연한 투구 폼과 빠른 피칭 템포는 선발투수로도 더없이 훌륭했으며 풀타임 선발투수 첫 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급조절능력까지 과시하고 있다. 150km에 가까운 직구와 120km대 체인지업을 자유자재로 던지는 ‘오프스피드 피칭’까지 해내고 있는 것. 이제는 전형적인 선발 체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기주의 마무리 변신 성공 여부 판단은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일단 성적은 좋다. 20경기에 등판한 한기주는 비록 2패를 안았으나, 11세이브 방어율 2.67·WHIP 0.96을 기록 중이다. 터프세이브와 블론세이브는 각각 2개씩 기록했다. 9이닝당 탈삼진은 무려 11.0개. 마무리투수로서 강속구와 탈삼진 능력을 갖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강심장이 아직은 검증되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현재 한기주의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보직이 바로 마무리라는 점이다. 아직 슬라이더 외에는 확실한 구종이 없는 한기주로서는 불같은 강속구를 극대화할 수 있는 마무리가 당장 위력을 떨치기에는 좋다.

하지만 데뷔 초에 마무리로 활약하다 선발로 전환한 경우에는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짧게 던지는 것과 길게 던지는 것의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 한기주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마무리를 오래 맡겨서는 안 될 것이라는 지적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갑작스레 이뤄진 신용운의 선발 전환은 아무래도 실패작이 될 조짐이다. 대체 외국인 투수로 영입한 펠릭스 로드리게스가 셋업맨을 고집하면서 필승 계투조로 활약하던 신용운은 시즌 중 불펜투수에서 선발투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신용운은 선발 등판 2경기에서 10이닝을 던져 9자책점을 기록했다. WHIP는 무려 1.90. 한 이닝꼴로 거의 2명의 주자를 출루시킬 정도로 투구 내용이 좋지 않다. 올 시즌 불펜에서 WHIP 0.97을 기록한 것과는 딴판이다.

불펜에서 등판한 20경기에서 39이닝 동안 5홈런밖에 기록하지 않은 신용운은 선발 전환 후 2경기에서 10이닝 동안 무려 4홈런을 맞았다. 셋업맨 신용운과 선발 신용운은 180도 다른 투수였다. 힘과 템포의 조절이 필요한 선발이 신용운에게는 맞지 않다는 지적. 더욱이 신용운은 윤석민처럼 겨우내 선발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니다. KIA의 주먹구구식 외국인선수 영입이 특급 불펜투수를 별 볼일 없는 선발투수로 만들었다는 아쉬움이 잇따르기 시작하고 있다.



◆ 투수에게는 몸에 맞는 보직이 있다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가장 돋보이는 투수는 다니엘 리오스(두산)다. 다승(8승)·방어율(1.64)·WHIP(1.03)·이닝(87⅔) 모두 리그 전체 1위. 최근 3시즌 연속 200이닝을 돌파하는 등 리그 최고의 선발투수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리오스가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하더라도 선발투수가 아닌 마무리투수였다. 2002년 KIA 입단 첫 해 리오스는 41경기에 구원으로 등판했다. 그러나 성적이 좋지 못했다. 6승3패13세이브 방어율 3.53·WHIP 1.35라는 기록에서 나타나듯 불안한 마무리였다.

하지만 선발 전환 후 승승장구하며 퇴출 위기에서 벗어났다. 때때로 무모할 정도로 정면승부를 즐기고, 하위 타순에서 방심을 잘하는 리오스에게 살얼음을 걸어야 할 마무리 보직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무리 실패 후 몸에 딱 맞는 선발 옷을 입고 성공한 리오스는 이제 누가 뭐래도 붙박이 선발 에이스다.

역대 최고의 불펜을 자랑하는 삼성에는 ‘K-K-O 트리오’가 있다. 권혁-권오준-오승환이 바로 그들. 삼성 불펜의 절대적인 핵심 3인방인 이들은 모두 불펜에서 특화된 투수들이다. 권오준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데뷔 시즌이었던 2004년에 선발로도 간간이 활약했으나 손가락 혈장장애로 인해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을지 아직 의문이며, 권혁은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에는 체력이나 떨어지고 레퍼토리도 부족하다는 평.

마무리투수 오승환은 팔꿈치 부상 경력이 있는 데다 확실한 결정구가 없어 선발보다는 마무리가 적합하다. 하지만 권오준은 선발투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고, 권혁도 궁극적으로는 선발투수로 키워야 할 재목이다. 오승환도 언제가 선발투수로 한번쯤 활약하고픈 마음을 보였던 바 있다. 불펜에서 공포 그 자체였던 이들이 향후 선발로 전환한 뒤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생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지금 현재 이들에게 맞는 옷은 경기 종반 상대를 얼음장처럼 식게 만들어버리는 불펜의 파란 유니폼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팔꿈치 재활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최고령 투수’ 송진우(한화)는 최근 불펜에서 등판하고 있다. 현재 한화의 5인 선발 로테이션이 꽉 차 송진우에게 자리가 나지 않은 탓. 하지만 송진우는 허약한 한화의 불펜진에 구세주로 떠오르고 있다. 7경기에서 송진우는 5⅔이닝을 던져 1패 1세이브 1홀드 방어율 4.76·WHIP 1.77을 기록했다.

기록 자체는 좋지 않지만, 불펜에서는 다량의 실점을 내주면 방어율을 비롯한 기록들이 치솟기 마련. 중요한 건 송진우의 피칭이다. 선발투수로도 최정상급의 위력을 보였던 송진우는 불펜에서도 공 한 개 차이로 스트라이크존을 조절하는 절묘한 컨트롤과 의표를 찌르는 볼 배합 등 오랜 기간 축적된 노하우로 타자들을 제압하고 있다. 과거 마무리투수로 활약한 경력이 있어 이번 불펜 전환이 결코 낯설지 않다.

최고령 투수답게 선발·마무리·중간 등 각종 보직을 두루 맡은 송진우에게는 어느 옷이든 잘 맞는 모습이다. 실제로 송진우는 프로야구 유일의 200승-100세이브 클럽에 등록된 선수다. 현역선수 중 송진우처럼 불펜과 선발을 넘나들며 선 굵은 행보를 걸어온 선수로는 임창용(삼성)을 꼽을 수 있다. 임창용은 선동렬-김용수-송진우에 이어 프로야구 통산 4번째로 100승-100세이브를 돌파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100승-100세이브 투수가 프로야구 26년 동안 단 4명만 나온 것에서 나타나듯 투수에게 보직은 하나의 타고난 천성이다. 선수 개개인은 물론 코칭스태프에서도 투수들에게 맞는 보직을 찾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 투수 개인의 성공과 팀의 성공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보직 결정은 반드시 신중하고 현명하게 결정해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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