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26>제우스신전에 아로새긴 신과 영웅들의 신화와 전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올림피아 제전은 그리스 민족 최대의 스포츠 축제였다. 올림피아가 왜 이 곳 제우스 신앙의 중심지였던 올림피아 성역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펠롭스의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헤라클레스와 관계된다. 두 이야기 모두 각자의 승리를 제우스신에게 감사드리고 기념하기 위해 인간들의 경주를 열었던 것을 올림피아 경기의 기원으로 연결 짓고 있다.
그 근거를 올림피아 성역의 중심에 있던 제우스신전에 새겨진 신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에서 그 신화의 편린을 만나보자. 유물보다 그 유물에 얽힌 스토리를 읽어야 당시 그리스 인들의 사유를 쫒아갈 수 있다.
펠롭스(Pelops)는 프리지아의 왕 탄탈로스의 아들이다. 그는 신들을 시험하고자 한 아버지에 의해 희생되었다가 신들에 가호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연을 지닌 인간이다. 제우스신의 총애를 받았던 탄탈로스 왕은 신들의 전지전능함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신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죽여 만든 요리를 대접한다.
신들은 이를 눈치 채고 먹지 않았다. 하지만, 딸 페르세포네를 잃고 슬픔에 빠져있던 데메테르여신이 얼떨결에 어깨살을 먹게 된다. 전모를 알게 된 신들은 탄탈로스에게 크게 노했다. 결국 그 벌로 탄탈로스는 ‘영원한 갈증’에 시달리는 벌을 받게 되고, 펠롭스는 다시 인간으로 소생한다. 다만 어깨 부분은 상아로 채워 넣어진 채.
아무튼 훗날 펠롭스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쪽의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Oinomaos)의 딸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에게 청혼하게 된다. 하지만 오이노마오스 왕은 자신이 사위의 손에 죽게 된다는 신탁이 두려워 자신의 딸에게 청혼하는 자는 모두 전차 경기에서 자기를 이겨야 된다는 조건을 내건다. 오이노마오스 왕은 당시 최고의 전차 경주자였다. 경기를 청하는 청년들은 모두 왕에게 져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는 청혼을 하는 청년과 딸 히포다메이아를 한 전차에 태워 정신을 혼란시키는 심리전까지 썼다.
목숨을 건 청혼에 펠롭스가 도전했다. 하지만 그는 전차 경주의 절대 강자 오이노마오스 왕을 정면 승부를 통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에 과욕을 부리면 반드시 파멸이 따르기 마련이다. 펠롭스는 왕의 마부 미르틸로스(Myrtilos)를 사전에 매수하여 왕의 전차 수레바퀴가 빠져나가도록 손을 써 놓고 전차 경기 중 왕이 자신을 추격하다 전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다.
전차경기에서 이긴 그는 공주를 차지하게 되고 왕이 사위에 의해 죽게 된다던 저주의 신탁은 결국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펠롭스는 경기에서 승리한 후 자신을 결정적으로 도운 미르틸로스를 배신한다. 그는 미르틸로스에게 자신이 공주와 결혼하게 되면 첫날밤에 공주와 자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변심했다. 그는 미르틸로스를 공주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유인하여 바다에 던져 죽인다.
펠롭스의 승리는 야비한 승리다. 정정당당한 시합이 아니다. 그는 공주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파렴치한 짓을 가리지 않았다. 사전에 매수공작을 통해 승리를 가로챈 펠롭스의 행태는 선수나 심판진의 담합보다 더 비열한 짓이다. 게다가 자신을 도운 검은 조력자를 속이고 살인까지 했다.
펠롭스의 비열하고 잔인한 죄의 대가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진다. 아가멤논 가문에서 친족 간의 살인극이 대를 이어진 것이 바로 그 죄업이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3부작 '오레스테이아'(Oresteia)에는 친족살해의 비극적 장면이 잘 나타나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이런 사건이 올림피아 제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하니 썩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스 인들은 올림피아 경기가 오이노마오스 왕과 펠롭스의 전차 경기에서 유래했다는 신화를 꽤 믿었던 모양이다. 올림피아 성역의 주신전인 제우스신전의 정면 페디먼트에 이 신화의 줄거리를 부조로 새겨 넣은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엘리스 인들이 제우스신전을 지으면서 펠롭스의 부당하고 비열한 행위가 신의 저주로 이어진 사실을 그리스 인들에게 영원히 경계하기 위해 이를 각인해 놓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들이여! 부정한 승리자 펠롭스의 업보를 기억하라” 라고 환기시키려던 의도는 아니었을까.
제우스신전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가장 웅장하고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제우스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과 동일한 간결한 도리아식 양식으로 지어졌고 규모도 비슷한 대건축물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이 길이 69.50미터, 폭이 30.80미터였고, 제우스신전 역시 비슷한 규모인 길이 64.12미터, 폭이 27.68미터였다. 지금은 이 거대했던 신전의 위세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후원으로 세워진 온전한 기둥 하나가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제우스신전의 파괴는 로마시대에 자행되었다. 393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올림픽 경기를 금지시켰다. 그는 제우스신상을 제외하고 제우스신전을 완전히 파괴시켰다. 만약 올림피아 제우스신전이 제대로만 보존되었다면 현재 남아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위용에 못지않은 웅장한 건축미를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신앙을 이교도로 탄압하던 기독교도와 로마인들의 무자비한 파괴행위로 인해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 사라진 것이 못내 안타깝다.
제우스신전은 제우스신상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제우스신을 위한 신전인 만큼 신전에 안치되었던 제우스 신상은 올림피아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참배대상이었다. ‘신들의 신’을 알현하고 승리를 기원하는 일은 출전하는 선수들에게는 가슴 벅차는 일이자 더없이 경건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특히 개인적 기원 이외에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와 코치, 심판진들은 공식적으로 제우스신상 앞에서 공정한 경기를 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이들을 위해 그리스 세계에서 최고의 제우스 신상이 만들어졌다. 엘리스 인들은 제우스신전이 건립된 후 40여년이 지나서 페이디아스에게 거대한 신상을 주문했다. 신상은 외부에서 만들어 제우스신전으로 옮겨오는 방식이 아니라 제우스신전 안에서 제작해 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신전 높이를 감안할 때 외부에서 제작하면 신전 안으로 거상을 안치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 최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페이디아스가 이 일을 맡았다. 그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황금과 상아로 만든 거대한 아테나여신상을 만들어 전 그리스에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시기와 모함을 받고 아테네에서 추방된 후 이곳 올림피아에 자리 잡고 제우스 신상과 숱한 예술작품들을 만들어냈다.
페이디아스는 8년여의 작업 끝에 제우스신상을 완성했다. 제우스신상은 무려 13미터에 달했고, 높이 90센티미터, 길이 10미터, 폭이 6.65미터 크기의 받침대 위에 올린 옥좌에 앉은 형상으로 조상되었다. 거대한 제우스신상의 정교한 조각과 위엄 있는 모습은 아테네의 아테나 신상과 함께 최고의 걸작으로 모든 이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리스의 철학자 필론(BC 160?~BC 80?)은 “크로노스가 천상에서 제우스의 아버지라면, 페이디아스는 지상에서 제우스에게 영생을 준 어머니이다.”라고 찬탄했다. 또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제우스신상의 아름다움을 자세히 묘사했다.
“제우스신은 옥좌 위에 앉아 있는데 그의 머리에는 올리브나무 형태의 왕관이 씌워져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머리를 가는 끈으로 묶고 왕관을 쓴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으며, 왼손에는 황금을 박아 장식한 지팡이(왕홀)를 쥐고 있다. 상아로 만들어진 어깨에는 꽃과 동물이 새겨진 아름다운 망토가 걸쳐져 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상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무덤, 로도스 섬의 청동 거상,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불린다. 목재와 상아로 만들어진 제우스신상은 그리스 조각 예술의 최고의 걸작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고, 475년에 대화재로 제우스신상은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제우스신전의 동쪽과 서쪽 페디먼트에 새겨진 신화는 올림피아 제전의 기원과 연관된다. 바로 정문인 동쪽 페디먼트에 펠롭스의 신화가 새겨져 있었다. 올림피아 고고학 박물관을 들어서면 첫 전시실의 양쪽에 제우스신전의 동쪽과 서쪽의 페디먼트를 장식했던 부조의 잔해들을 재구성하여 전시하고 있다. 제우스신전의 지붕 부분을 구성했던 페디먼트와 메토프의 규모와 형상을 바탕으로 제우스신전의 웅장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제우스신전의 동쪽 페디먼트에 등장하는 인물과 형상은 펠롭스 신화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제우스신이 중앙에 서 있고, 왼쪽으로 창을 든 오이노마오스 왕과 그의 왕비 스테로페가 서 있다. 그리고 왕의 마부 미르틸로스가 무릎을 꿇고 전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의 고삐를 쥐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창을 들고 서 있는 펠롭스와 그 옆에 오이노마오스의 공주 히포다메이아가 서 있다. 그 옆으로 시녀가 무릎 꿇고 마차를 대령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펠롭스 신화의 등장인물들을 한 자리에 묘사한 것이다.
신화의 주인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때론 조연(助演)이 감동적인 역할을 할 때도 적지 않다. 제우스신전 동쪽 페디먼트의 재구성 부조에서 필자는 즐거운 발견을 한다. 바로 지붕 양쪽 끝 모서리로 갈수록 좁아진 페디먼트의 협소한 공간에 특이한 자세로 배치되는 좌우 조연들이 바로 그들이다. 대개 공간이 높은 페디먼트 중앙에는 신과 인물들을 직립으로 세우지만, 가장자리의 협소한 공간에는 인물을 앉히거나 엎드린 자세로 배치할 수밖에 없다.
제우스신전의 동쪽 페디먼트의 오른쪽 모서리에는 예언자, 마부, 클라데오스 강의 신이 부조되어 있고, 왼쪽 모서리에도 역시 마부, 예언자, 알페이오스 강의 신이 부조되어 있다. 마부가 묘사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올림피아 성역을 감싸고도는 강의 신이 청년으로 의인화하여 묘사되고 예언자(seer)가 두 명이나 부조된 것은 예사롭지 않다.
필자에게는 올림피아의 신성한 자연과 역사를 관통하는 통찰을 지닌 예언자가 펠롭스의 부정행위와 범죄를 똑똑하게 목격하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을 인간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묘사로 읽힌다. 예언자의 기품 있는 얼굴과 펠롭스를 직시하는 그윽한 눈매가 펠롭스 가문의 저주를 묵직하게 예고하는 암시처럼 느껴진다. 펠롭스가 자연신과 예언자의 목도(目睹)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이 시리즈 조각물들이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올림피아 제전의 또 다른 기원은 헤라클레스의 신화와 연관된다. 테베 출신인 헤라클레스는 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쪽인 엘리스 지방까지 왔었을까? 헤라클레스만큼 그리스 전역에 자취를 남긴 영웅도 드물다. 그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는 그 유명한 12가지 고역 중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헤라클레스는 테베의 왕비 알크메네와 제우스신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半神)이었다. 사실 ‘헤라클레스(Hercules)’라는 이름은 ‘헤라의 영광’이라는 뜻이지만, 제우스신의 외도로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이름과 달리 끊임없이 헤라의 질투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제우스신에 대한 헤라의 애증이 헤라클레스에게로 전이된 셈이다.
아무튼 헤라의 저주와 질투로 헤라클레스는 잠시 발광하여 아내 메가라가 낳아준 자기 자식들을 모두 죽이는 죄를 저지른다. 이후 헤라클레스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가서 죄를 정화받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신탁을 구한다.
그에게 내려진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티린스 왕 에우리스테우스에게 가서 12년 동안 봉사하며 그가 부과하는 열 가지 과업을 완수하면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가 그리스 민족의 영웅으로 불멸하게 된 계기는 바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이겨낸 12가지의 과업에 있었다(처음에 열 가지 과업이었으나, 그 중 두 가지를 인정받지 못해 2가지 과업이 추가로 부과되었다).
그 과업 중의 하나가 엘리스, 파사, 올림피아 지역을 아우르던 아우게아스 왕의 외양간을 하루 만에 치우는 일이었다. 수천 마리의 가축을 기르던 왕의 외양간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치우지 않아 불결하기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아우게아스 왕에게 외양간에 쌓인 똥을 깨끗이 치울 테니 가축 떼의 십분의 일을 달라고 요청한다. 아우게아스는 외양간 청소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 믿고 그렇게 하자고 약속했다. 이 서약에 왕의 아들 필레우스가 보증을 섰다.
헤라클레스는 가축우리의 토대를 허물고 인근의 알페이오스 강과 페네이오스 강의 물줄기를 가축우리로 돌려 하루 만에 말끔히 청소했다. 헤라클레스는 과업 수행의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아우게아스 왕은 헤라클레스의 과업이 에우리스테우스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므로 보수를 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또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아우게아스 왕에게 보수를 요구했던 일을 알게 된 에우리스테우스도 헤라클레스가 보수를 받고 일을 했다며 과업 수행으로 쳐주지 않았다. 처음의 열 가지 과업에다가 추가 과업이 주어진 이유다. 헤라클레스는 양쪽에서 모두 인정받지 못하게 된 셈이다. 사실 자신의 의무로 부과된 과업 수행에 대해 대가를 요구한 것은 헤라클레스의 잘못이다.
아무튼 헤라클레스는 훗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엘리스의 아우게아스 왕을 공격하여 그와 자식들을 죽인다. 헤라클레스는 전쟁의 전리품을 제우스신에게 제물로 바쳐 승리에 감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형제들과 달리기 경주를 하였다. 이것이 고대 올림피아 경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전역에서 숭상 받던 최고의 역사(力士)이자 전사(戰士)였다. 그리스 인들이 헤라클레스와 같은 위대한 영웅을 인간의 체력과 기량의 한계를 다투는 올림피아 경기의 창설자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헤라클레스의 신화는 제우스신전의 프리즈에 잘 묘사되어 있다. 헤라클레스가 수행한 12가지 고역(苦役)이 담긴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백과사전 격인 아폴로도로스가 지은 『비블리오티케(Bibliotheke)』에서 헤라클레스가 극복해 낸 12가지의 고역이 차례로 묘사되고 있다.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을 장식했던 부조 중 잔해가 보존된 5가지 과업만 소개한다. 헤라클레스의 업적이 고대기에 부조된 이 유물들은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후에 이 소재는 숱한 미술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첫 번째 고역은 네메아의 사자를 처치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사자와 대결하여 목을 졸라 죽이고 그 가죽을 벗겨 사자머리를 투구처럼 쓰고 다녔다. 이후 몽둥이와 함께 사자 머리는 헤라클레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다. 맨손으로 싸워 이겨 사자를 잡은 헤라클레스의 괴력은 헤라클레스의 용기와 담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다섯 번째 고역은 위에서 설명한 아우게아스 왕의 외양간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여섯 번째 고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앙부 아르카디아의 스팀팔로스 숲에 있는 새 떼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아테나여신이 헤파이스토스로부터 받은 청동 캐스터네츠를 받아 이를 흔들어 새 떼를 쫒고 화살을 쏘아 몰아냈다. 특이한 것은 헤라클레스가 고역을 극복하는 과정에 늘 아테나 여신이 성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와 제우스의 딸 아테나 사이의 긴장과 견제가 지속되었음을 알아챌 수 있다.
일곱 번째의 고역은 크레타의 난폭한 황소를 잡아 에우리스테우스 왕에게 끌고 가는 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크레타 섬으로 가서 황소와 맞서 싸워 이기고, 황소를 붙잡아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끌고 가 보여주고 풀어줬다. 이 황소는 이후 스파르타와 이스트모스를 거쳐 아티케의 마라톤 지역까지 가서 주민을 괴롭히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열한 번째의 고역은 헤스페리데스(Hesperides)의 황금사과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불사의 용이 지키고 있는 이 황금사과는 원래 제우스가 헤라와 결혼할 때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이 황금사과를 찾기 위해 리비아와 이집트, 카우카소스 산을 전전한다. 그는 히페르보레오이 족의 나라로 아틀라스를 찾아가 꾀를 써서 그의 도움으로 황금사과를 구해온다.
제우스신전의 서쪽 페디먼트는 야만족인 켄타우로스족과 라피테스족의 전투를 담고 있다. 이 스토리는 그리스 민족이 공유하는 승리의 전설로 여러 신전의 메토프를 장식하는데 자주 쓰이는 단골메뉴다. 텟살리아의 왕위에 오른 페이리토오스(Peirithous)에 초대된 켄타우로스족이 신부와 여자들을 납치하려다, 이를 저지하는 라피테스족과 전투가 벌어진다.
이 잔치에 함께 초대받았던 페이리토오스의 친구인 아테네의 테세우스,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 등이 합세하여 켄타우로스족을 물리친다. 켄타우로스는 인간의 상반신을 하고 몸통은 말인 반인반마이다. 이 전설은 그리스가 문명화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리스 민족이 야만족들의 도전을 이겨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여러 신전에 이 전설을 부조로 새기는 이유도 그리스 선조들의 국난극복의 영웅담을 기억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올림피아의 중심에 있는 제우스신전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제우스신앙의 중심지 역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 세계의 공동의 숭상을 받는 신전이었다. 따라서 그리스 민족의 영광스런 과거를 아로새겨 이곳을 찾는 그리스 민족에게 외적에 대항하는 결연한 의지를 심어주는 기능을 했을 듯싶다.
이곳 올림피아의 제우스신전의 부조들 역시 많이 손상되었지만, 부분적으로 형상이 남아있는 의미 있는 작품들이 꽤 있다. 현존하는 작품들을 감상해 보자. 제우스신전의 서쪽 페디먼트의 중앙에는 아폴론이 서 있었다. 바로 오른쪽에는 켄타우로스를 공격하는 테세우스, 라피티스족에게 얼굴 부위를 공격받고 있는 켄타우로스가 부조되었다. 왼쪽으로는 켄타우로스를 공격하는 페이리토오스, 데이다메이아를 납치하려는 켄타우로스족 에우리티온(Eurythion)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신전을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아로새겼다. 신전은 하나의 거대한 그림책이 되었던 셈이다. 신전에 참배하는 그리스인 누구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리스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화와 전설의 스토리에 공감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스스로 그리스인임을 재확인하는 일이기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화와 전설들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에 의해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표현되었다. 부조 하나하나가 보는 것만으로도 찬탄이 저절로 나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걸작들이다. 단순한 서사(敍事)가 아니다.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서사는 인간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고 더 오래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조각과 건축에 서사를 담은 그리스인들의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고전이자 신화가 된다. 몇 줄의 서사보다 하나의 부조가 주는 감동이 훨씬 더 큰 이유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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