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증산성‘에서 만난 늙은 점쟁이 할매는…

최진연 유적전문기자

입력 2014.03.09 10:27  수정 2014.03.09 10:33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산성답사는 조부모 생가를 찾아가는 심정

백제의 도읍지 부여 남쪽에 석성산성이 있다면 북쪽에는 증산성이 있다. 도읍지를 중심에 두고 크고 작은 산성들이 사비성을 방어하기위해 겹겹이 쌓여있다. 사비성에서 가장 높은 부소산성 낙화암에 올라서면 이들 산성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낙화암은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의 암벽, 나당 연합군이 백마강으로 상륙해 이 절벽을 타고 올라와 사비성을 함락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특히 백제와 일본, 나당연합군의 혈전을 벌였던 백촌강 싸움터도 이곳이다.

증산성에서 가장 잘 보존된 남쪽성벽ⓒ최진연 기자

백제의 젖줄 백마강을 굽이 보던 요충지 증산성으로 가본다. 옛 군사들은 사라졌지만 산성은 지금도 도읍지를 향해 충성을 다하고 있다.

증산성은 해발 160m의 높지 않는 산 정상에 테를 두른 듯이 하얀 차돌을 이용해 돌아가며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멀리서보면 흰 용이 산을 휘감고 있는 형상이다. 규모도 보루처럼 작고 둘레만보면 약 600m 남짓하다. 성벽 안쪽에는 내호로 추정되는 통로가 남아 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됐으며 널브러진 돌무더기를 볼 때 성벽 폭은 어림잡아 8m 정도다. 유일하게 남쪽 성벽만 길이가 약 20m 정도 남아있는데 높이는 약 3m, 축성법을 보면 바깥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산성아래 산촌 아이들의 동심어린 표정들 1990년촬영ⓒ최진연 기자

성문은 동·서·북쪽에 흔적이 남아 있는데, 동문지 폭은 6m이며, 문지양쪽 모서리 성벽은 휘어지는 느낌이 보일정도다. 서문지는 남서방향으로 이어진 성벽사이에 있는데 폭이 약 4m 정도로 추정 된다.

북문지폭은 4.3m로, 문지와 연결된 성벽의 높이는 5m 정도다. 산성에 필수조건인 수구는 지대가 낮은 동쪽성벽에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돌무더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

남쪽성벽 안쪽에는 2개의 건물터가 있다. 하나는 동문지와 산 정상 사이 평탄지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서쪽성벽 현재 산신각 자리다. 우물은 2곳이 있는데 산신각 옆에 있는 것은
지금도 사용하는 우물이다. 이들 우물은 옛 군사들이 사용했던 당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발굴조사를 하면 답이 나온다.

증산성의 형태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형상으로 산정상부가 서쪽성벽 방향에 치중돼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의 회청색경질토기 몸통조각이 발견됐다.

민가를 개조해 만든 산신각 내부모습과 할머니ⓒ최진연 기자

조선 중기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부여현 서쪽 14리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1,269척이며 그 안에 우물하나가 있다고 했다. ’고성성‘으로도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정월에 신라가 장병을 보내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기고, 2월에 다시 백제가림성(임천면)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는 기록을 볼 때 증산성은 백제 부흥군이 최후까지 중요한 거점으로 이용했음을 알 수 있는 산성이다.

증산성에도 남매축성술의 전설이 있다. 힘이 장사인 오빠와 여동생이 서로 힘겨루기 내기를 했다. 내기에서 지는 사람이 죽기로 약속하고 하루 만에 오빠는 산성을 쌓고 여동생은 무거운 솥을 이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두 남매가 약속대로 내기를 시작하자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힘이 약한 아들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여동생을 꾀어, 지도록 해 죽게 만들었다.

이들 전설은 남자가 필요했던 당시의 시대 상항을 표현한 것으로 전국곳곳 산성이 있는 곳이면 전해지는 애기들이다.

성벽위에 산신각으로 사용하는 민가ⓒ최진연 기자

산성에서 내려다본다. 한때 위풍당당했던 석림은 이제 부서지고 무너졌다. 산성아래는 서천 공주고속도로가 개통돼 자동차 소음이 증산성까지 치고 올라온다. 성 돌이 깨지는 아픔을 느낄 정도다.

성안에는 민가를 산신각으로 개조해 찾아오는 단골들에게 점을 바주는 팔순의 할머니가 있다. 기자는 사진을 찍기 위해 협조를 구하고 무속인과 산신각 분위기를 취재했다. 그는 다른 무속인이 살던 이곳을 인수받아 20년전에 혼자 안착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행여 산성 발굴조사나 복원·정비 또는 주변 환경이 바뀌면 것에 매우 민감해 했다. 오갈 때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듯 처량함이 언뜻 스쳤다. 늙은 할매가 안쓰러워 산성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니 할매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신성리에서 본 증산성 흰용이 능선을 감싸고 있는 듯 하다ⓒ최진연 기자

기자는 25년전 증산성에 취재 온 일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내려 왔지만 마을 어귀와 민가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당시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오는 아이들을 세워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어둔 동심어린 표정들의 개구쟁이들 사진을 함께 소개한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을 산촌 아이들이 그립다.

산성답사는 늙은 조부모의 생가를 찾아가는 심정이다. 그곳은 언제나 나를 살갑게 맞아주었다. 작은 성돌, 우물하나에도 호국의지의 표상과 무수한 옛이야기가 담겨 있어, 하늘높이 솟은 마천루 이상의 감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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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연 기자 (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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