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201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군사 퍼리에드 당시 김정은 제1위원장과 장성택 부위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고모 김경희의 남편으로서 북한이 내세우는 ‘백두혈통’의 후견자로 인식되어온 장성택의 실각이 사실이라면 이는 김정은 유일지배체제를 강화시키려는 의도인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동안 북한의 2인자로까지 불리던 장성택의 실각과 그의 최측근인 리용하 당중앙위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공개처형된 것은 이들이 나름의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는 상황이다.
이와 동시에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미 4번이나 숙청당했다가 복권된 사실을 되돌아볼 때 어쩌면 장성택은 이번에도 김 씨 일가의 권력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공포정치’의 희생양일 뿐일 수도 있다.
대개 장성택의 숙청과 관련해선 김정일 시절 두차례의 사건이 주로 회자되고 있지만 장성택은 실은 숙청과 회생의 반복되는 전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2002년 숙청사건에선 이번처럼 장성택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그의 최측근인 보안성 35국장이 총살로 처형당했다.
주목할 점은 이 사건은 김정일으로 권력이 넘어가던 즈음인 1996~1998년 지금의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에 해당하는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이던 채문덕이 주도하는 ‘심화조 사건’으로 간부 6000여명이 총살되거나 무자비하게 숙청당한 사건의 연장선으로 단행됐다.
김정일은 승계 직후 그의 집권을 반대했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부주석이던 박성철을 강등시켰다. 그러던 중 2002년 4월 서기실 가족담당서기를 자신의 송도초대소에 몸보신시키려 보냈다가 당시 경비부서이던 인민보안성 35국에서 서기 일가족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성택 등에 대한 숙청을 단행한 것이다.
김정일 사망 후 각 도·시에 있던 김일성 초대소와 특각들 중 몇 개가 도당에 이관되면서 이를 장성택이 관리하고 기존 호위사령부 관할이던 경비를 인민보안성 35국에서 맡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김일성 권력의 잔재를 김정일이 완전히 빼앗기 위해 휘두른 칼자루를 당시 중앙당 조직부 1부부장 겸 본 부당 책임비서였던 리제강이 잡았고, 장성택은 모든 직무에서 해임됐으며, 35국장은 총살당하고, 35국에서 근무하던 전 보안원과 심지어 하전사들까지 100% 해임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리제강이 장성택이 복권된 이후인 2010년 6월 평양-원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아직까지 ‘암살 의혹’으로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해 대북소식통들은 “리제강이 김정일의 선군영도에 반발하고 김정은의 후계세습에 불만을 표시하는 바람에 죽었다는 소문이 간부들 사이에서 돌면서 불안감에서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가 많았다”고 전했다.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장성택(46년생)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해 동급생인 김경희와 교제를 시작했다. 김경희가 장성택의 훤칠한 외모와 유려한 말솜씨에 반해 먼저 구애(求愛)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이 교제를 반대해 장성택을 원산 농과대학으로 쫓아낸 적이 있고 이 사건이 첫 번째 숙청인 셈이 된다.
이후 장성택은 1972년 김경희와 결혼해 김일성의 사위가 됐고 출세 가도를 달렸다. 장성택은 1986년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88년 노동당 청소년사업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권력 핵심에 진입했다. 1995년 노동당 내에서도 가장 핵심으로 꼽히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장성택은 1978년 동평양 외교초대소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측근들과 파티를 벌이다 보위부에 적발됐다. 당시 “너(장성택)가 뭔데 내 흉내를 내느냐”는 김정일의 불호령으로 장성택은 강선제강소 작업반장으로 쫓겨났다.
그가 다시 실세가 된 건 1989년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 전후로 분석된다. 당시 평양 재건설 사업을 맡았던 장성택은 기일 내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에 김정일은 그를 ‘노력영웅’이라고 칭하며 3대혁명소조부장(1989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1995년) 등으로 중용했다. 다른 형제 2명인 장성우, 장성길도 함께 승진했다.
그리고 장성택은 2002년 4월에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그 측근이던 보안성 35국장이 총살로 처형당하는 사건에 휘말렸다.
장성택은 연이어 2004년 초에도 측근의 호화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발각되면서 ‘분파 조장’ 혐의로 실각했고, 당시 측근들까지 모두 좌천됐다. 이 사건 역시 리제강의 견제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장성택은 그러나 2006년 당 제1부부장으로 복귀해 2007년 당 행정부장으로 승진하면서 다시 권부 핵심에 올랐다. 이에 대해선 김정일이 말년으로 갈수록 친척들과 ‘혁명 2세대(김일성 측근 후손)’를 중용하는 경향 때문인 것으로 대북전문가들의 분석하고 있다.
장성택의 실각과 관련해 4일 현재까지 북한 당국이 특별히 공개한 내용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안보당국은 3일 “최근 북한 노동당 행정부 내 장성택의 핵심 측근들에 대한 공개처형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장성택도 실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내부적으로 장성택 측근들을 비리 등 반당 혐의로 공개처형한 사실을 전파하고 김정은에 대한 절대충성을 강조하는 사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고 밝한 바 있다.
북한 김정은 집권 이후 ‘2인자’로까지 불렸던 고모부 장성택의 실각설에 대해선 부패 문제 등으로 인한 사실상 숙청이라는 분석과 동시에 그의 신변에는 특별한 이상이 없을 것이란 견해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한편, 장성택의 실각은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이 주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번 사태로 장성택이 북한의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퇴장하게 돼 북한 지도부에서 최룡해 총정치국장이 사실상 제2인자 지위를 공고히 하게 됐고,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의 영향력도 더욱 커지게 됐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최룡해 역시 간부들의 거센 견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이고 자리보존이 얼마나 갈지 알 수 없다는 전망도 가능하다. 최룡해의 총정치국장 발령에 리영호 전 총참보장 등 많은 군부 간부들이 완강하게 반대했고, 사실상 많은 군부 내 간부들을 숙청하고 2012년에야 발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대북소식통은 “최룡해 임명 당시에도 많은 간부들 사이에선 최고위 간부들에 대한 임명과 해임을 김정일이 독단적으로 단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면서 일개인에 의한 스탈린식 정권을 끝장내야 한다는 주장들이 속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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