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6개 연구과제·1만7000명 지원…첫 우수 연구자 10명 선정
구혁채 차관, 논문·특허 중심 R&D 평가 개편 예고
5일(목)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개최된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애뉴얼 포럼에서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임채현 기자
삼성이 14년간 1조2000억원을 들여 뒷받침한 기초과학 연구가 산업 현장에서 결실을 맺고 있다.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도전적 연구에 꾸준히 투자한 결과, AI 데이터센터의 처리 효율을 높이는 기술이 스타트업 창업으로 이어지고 바이오 분야에서는 코스닥 상장사까지 탄생했다.
삼성은 5일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에서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2026 애뉴얼 포럼'을 열고 지난 14년간 축적한 연구 성과를 공유했다. 특히 올해 처음으로 기초과학과 소재·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우수 연구자 10명을 선정해 시상하며 장기 연구 지원의 성과를 조명했다.
이날 행사에는 구혁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과 황정아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충권 국민의힘 의원,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을 비롯해 박홍근 삼성전자 SAIT 원장, 장석훈 삼성 사회공헌총괄 사장 등 국내 과학기술계 관계자와 연구진 450여 명이 참석했다.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은 2013년 출범한 민간 주도형 연구개발(R&D) 지원사업이다. 기초과학부터 소재, ICT 융복합 분야까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적인 과제를 발굴해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삼성은 연구과제의 단기적인 성공 가능성보다 창의성과 도전성에 무게를 두고 장기간 연구를 뒷받침해 왔다.
사업 출범 이후 올해까지 지원한 연구과제는 총 916개다. 누적 연구비는 1조2000억원에 달한다. 교수진과 박사후연구원, 석·박사 연구원 등 1만7000여 명의 과학기술 인력이 참여했다.
삼성은 2014년부터 연구자들이 성과를 공유하고 새로운 협력 기회를 모색할 수 있도록 애뉴얼 포럼을 운영해 왔다. 지난해에는 행사를 외부에 공개한 데 이어 올해는 첫 우수 연구자 시상을 도입하며 지원 성과를 조명하는 범위를 넓혔다.
이번 우수 연구자 선정은 단순히 논문이나 특허 실적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구가 새로운 학문적 영역을 열었는지, 후속 연구나 산업계로 얼마나 확장됐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삼성은 완료된 연구과제 644개를 대상으로 연구과제의 우수성과 연구 성과의 확장성, 연구자의 성장 가능성, 학계·산업계 파급력 등을 평가했다. 분야별 석학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약 4개월간 심사를 진행해 기초과학 분야 4명, 소재·ICT 분야 6명 등 총 10명을 선정했다.
5일(목)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개최된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애뉴얼 포럼에서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국양 이사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삼성
이날 공개된 연구 성과 가운데 산업적 활용 가능성이 주목받은 분야는 AI 데이터센터의 컴퓨팅 효율을 높이는 데이터처리장치(DPU) 기술이다. 김장우 서울대 교수는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서버 병목 현상을 줄이기 위한 새로운 컴퓨팅 구조를 개발했다.
최근 생성형 AI의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에서 처리해야 하는 연산량과 데이터 이동량이 급증하고 있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AI 가속기의 성능이 높아지더라도 서버 내부에서 데이터를 주고받는 과정이 원활하지 않으면 전체 시스템의 성능이 제한될 수 있다.
김 교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처리장치(CPU)에 집중된 데이터 이동과 관리 업무를 DPU에 분담시키는 방식을 개발했다. CPU가 처리하던 네트워크와 저장장치 관련 작업을 별도의 장치로 넘겨 서버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구조다.
해당 연구는 실제 창업으로도 이어졌다. 김 교수는 2022년 DPU 설계 스타트업 '망고부스트'를 설립했다. 망고부스트가 개발한 DPU 시제품 'MBDPU-1'은 기존 서버 구조와 비교해 데이터센터 성능을 3배 이상 높이고 CPU 사용을 50% 이상 줄일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AI 추론 최적화 소프트웨어 '망고 LLM부스트'를 출시하며 AI 데이터센터 인프라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김 교수는 이날 행사에서 실물 컴퓨팅 시스템을 개발하기까지 수년이 걸렸지만 장기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서둘러 요구하기보다 기술을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준 것이 제품 개발과 창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차세대 배터리 분야에서도 연구 성과가 소개됐다. 최장욱 서울대 교수는 물을 기반으로 한 전해액을 사용하는 '수계(水系) 전지'의 성능 저하 원인을 규명하고 이를 개선하는 전극·전해액 소재를 개발했다.
수계 전지는 가연성 유기 전해액을 사용하는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에 비해 화재 위험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저장 용량이 적고 충전과 방전을 반복할수록 성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어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최 교수는 성능 저하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전극과 전해액 소재를 개발해 이러한 한계를 개선할 가능성을 제시했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과 연계되는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원천기술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오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학·물리학 연구도 주목받았다. 수리과학 분야 수상자인 오성진 미국 UC버클리대·고등과학원 교수는 자연계의 기본적인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밀스 방정식의 해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연구했다.
이러한 연구는 블랙홀 내부와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 나타나는 수학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오 교수는 블랙홀 내부의 불안정성을 수학적으로 규명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삼성호암상 과학상 물리·수학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5일(목) 서울 강남구 웨스틴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서 개최된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 애뉴얼 포럼에서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삼성
기초과학 분야에서는 이현우 포스텍 교수(물리학), 박정원 서울대 교수(화학), 정원석 KAIST 교수(생명과학)도 우수 연구자로 선정됐다.
박정원 교수는 나노입자와 단백질 등 미세 물질의 구조와 변화를 원자 수준에서 관찰하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기존 연구에서 개발한 관찰·분석 기술을 바탕으로 에너지 전환과 화학물질 변환에 활용할 수 있는 촉매 연구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정원석 교수는 뇌 속 신경세포와 주변 세포의 상호작용을 연구해 왔다. 특히 뇌의 면역 관련 세포가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 구조인 시냅스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는 연구를 통해 뇌 기능과 신경계 질환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소재·ICT 분야에서는 김봉수 UNIST 교수(전자소재), 유창식 성균관대 교수(전자소자), 최장욱 서울대 교수(에너지·환경), 유홍기 KAIST 교수(바이오·메디컬), 김장우 서울대 교수(통신·컴퓨팅), 황성주 KAIST 교수(AI로보틱스) 등 6명이 선정됐다.
이 중 유홍기 교수는 광학 기술을 이용해 인체 내부를 정밀하게 관찰하는 의료 영상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자체 개발한 기기를 이용해 심혈관 질환 환자의 체내 영상을 확보한 연구 경험을 소개했다. 향후 환자 상태에 맞춘 정밀 진단과 치료에 활용할 수 있는 의료기술 개발이 목표다.
황성주 교수는 여러 컴퓨팅 자원을 분산해 활용하는 AI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다. 개별 컴퓨팅 자원의 연산 능력을 연결해 대규모 AI 모델을 효율적으로 구현하고, 이를 과학적 발견에 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기초연구가 실제 기업 설립과 자본시장 진입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서울대 윤태영 교수가 창업한 바이오 기업 '프로티나'는 단백질 간 상호작용을 측정하는 독자 기술을 바탕으로 AI 기반 항체 신약 개발 플랫폼을 구축했다.
단백질이 다른 단백질과 결합하고 반응하는 과정을 측정하는 'SPID(Single-molecule Protein Interaction Detection)' 기술을 활용해 관련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AI에 학습시켜 항체 신약을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프로티나는 이러한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대해 지난해 7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학술 연구에서 출발한 기술이 바이오 기업 창업과 상장으로 이어진 사례다. 삼성은 연구 성과가 논문 발표에 머무르지 않고 후속 연구와 기술 사업화로 연결될 수 있도록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연구비 지원 외에도 전문가 멘토링과 기술 교류, 지식재산권(IP) 관련 자문, 기술 창업 지원 등을 제공하고 있다. 올해 선정된 우수 연구자들에게도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술 워크숍 개최를 지원하고, 후속 연구와 산업계 협력 기회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국내 연구개발 지원 체계의 변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구혁채 과기정통부 제1차관은 축사에서 정부의 R&D 투자 규모가 크게 확대됐지만, 이제는 투자 확대를 넘어 연구의 질적 수준과 실질적인 성과를 높여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구 차관은 국내 과학기술이 추격 단계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기존 연구 지원·평가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특히 내년부터 과기정통부 R&D 과제 평가에서 논문·특허 관련 평가 지표를 폐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이 정량적 실적을 채우는 데 집중하기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평가 체계를 바꾸겠다는 취지다.
구 차관은 연구개발 정책의 방향으로 임무 중심 연구, 도전적인 과제 발굴, 실질적인 성과 창출, 데이터 기반 연구관리 등을 제시했다. 또 영문 연구계획서 작성과 관련한 지원도 강화해 연구자들이 보다 효율적인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연구 성과의 양보다 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평가 체계 개편을 예고한 가운데, 삼성의 미래기술육성사업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도전적인 연구를 지원하는 민간 R&D 모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삼성은 2013년 사업 출범 이후 연구비 지원에 그치지 않고 연구자 간 교류와 후속 연구, 기술 창업 등 연구개발 전 단계에 걸쳐 지원을 확대해 왔다. 연구 성과를 단기간에 판단하기 어려운 분야에서도 연구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국양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 이사장은 이날 환영사에서 "14년 전 사업을 준비하면서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지 고민했으며, 누구나 답할 수 있는 문제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문에 도전하는 연구를 지원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국 이사장은 "지난 시간 동안 연구자들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가 축적되면서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도약을 이끄는 의미 있는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며 "앞으로도 연구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자유롭게 탐구하고 미래 과학기술의 지평을 넓혀 갈 수 있도록 든든히 뒷받침하겠다"고 밝혔다.
우수 연구자 시상자로 나선 박홍근 삼성전자 SAIT 원장도 장기 연구 지원이 학술 성과뿐 아니라 산업적 성과로 연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 원장은 "삼성미래기술육성사업이 기초과학 분야를 지원하고 젊은 과학자를 발굴·육성하며, 연구 단계에 그치지 않고 스타트업 창출로도 이어졌다"며 "이러한 사업의 방향이 학계와 산업계 모두에게 진정한 가치를 만들어낸다고 믿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이 자리가 학계와 산업계 간 더 깊은 네트워킹과 치열한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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