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의병장들 – 김면, 손인갑, 김준민 [정명섭의 실록 읽기㊼]

유명준 기자 (neocross@dailian.co.kr)

입력 2026.11.03 14:00  수정 2026.11.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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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나면 영웅의 이름이 추려진다. 수많은 사람이 싸웠지만 기억되는 이름은 몇 개뿐이다. 임진왜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힘은 결코 몇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만, 후대의 기억은 언제나 소수의 이름에만 자리를 내어준다. 곽재우, 권율, 이순신. 그 이름들이 전쟁 전체를 대표하는 얼굴이 되는 사이, 같은 시간 같은 땅에서 싸우다 사라진 이름들이 있다. 기록이 그들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지만, 기억은 그들을 지웠다. 김면, 손인갑, 김준민이 그런 사람들이다.


김면은 고령에서 기병하여 거창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본래 학문으로 이름을 알린 영남 사림의 선비였다. 그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 두 거유의 문하를 함께 거친 드문 이력의 학자이기도 했다. 성리학의 정통을 이은 선비가 붓 대신 칼을 든 것은 그 자체로 당대 사람들에게 남다른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처음 의병을 모을 때 그를 따른 것은 같은 고을의 유생들과 향민들이었다. 숫자도 적고 무기도 변변치 않았다. 그러나 김면이 택한 전술은 정면 대결이 아니었다. 거창과 고령 일대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활용해 왜군의 이동로와 보급선을 끊었다. 1592년 7월, 우두령 고개를 넘으려던 1500여 왜군을 매복으로 격퇴한 우척현 전투가 그 전형이었다. 병력도 무기도 열세였던 의병이 지형을 미리 장악하고 기다렸다가 일시에 들이치는 방식으로 정규군 못지않은 실력으로 왜군을 무너뜨린 것이다. 정면에서 부딪쳐 이길 수 없다면 지형과 시간을 이용해 소모시키는 방식이었다. 지례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과 손을 잡고 왜군의 선봉을 요격했고, 무계에서도 승전을 거뒀다. 그 공으로 합천군수에 임명될 만큼 전과가 컸고, 이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라는 정규 관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유생 출신 의병장이 정규 지휘관 자리에 오른 것은 그의 전과가 결코 우연이나 소규모 유격전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진주성 북장대 – 출처 : 직접 촬영


김면이 활동한 경상우도 내륙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서진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로였다. 그 길목을 막은 것이 김면의 의병이었다. 곽재우가 낙동강을 지켰다면, 김면은 그 배후의 산악 통로를 지킨 셈이다. 이 때문에 후대의 평가에서 김면은 곽재우, 정인홍과 나란히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작 그 이름이 널리 회자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다. 1593년 봄, 그는 진중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전쟁터에서 화살이나 총탄에 죽지 않고 과로와 질병으로 죽은 것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된 직후였다. 칼에 맞아 전사했다면 그의 이름은 더 크게 남았을지도 모른다. 극적인 최후가 아니었기에, 그리고 임지에서 병사했기에 더 쉽게 잊혔는지 모른다.


손인갑은 밀양 출신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합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정인홍 휘하에서 중군을 맡아 낙동강 방어에 앞장섰다. 정인홍이 이끄는 경상우도 의병 조직에서 손인갑이 맡은 중군은 전투의 실질적인 선봉을 지휘하는 자리였다. 학자 출신 지휘관 정인홍이 전략과 명분을 세웠다면, 무장 출신 손인갑은 그것을 실제 전투로 구현하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자 기사는 손인갑을 두고 "무용이 절륜하여 군진에서 눈에 띄었다"고 적었다. 무신 출신이었던 만큼 그의 전투 방식은 유생 출신 의병장들과는 결이 달랐다. 무계, 사원동, 마진 등 낙동강 일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활약한 손인갑은 동래부사에 임명되는 포상을 받았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된 지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 자리를 다시 지킬 인물로 지명된 것이다. 그러나 부임 전에 초계에서 왜군을 쫓다 전사했다. 왜군의 칼이나 총탄에 죽은 것이 아니라, 패주하는 적을 쫓던 중 말이 모래 구덩이에 빠지면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전장의 승부가 아니라 사소한 사고가 그의 마지막을 결정지은 셈이다. 임명장을 받았지만 부임하지 못한 관직, 그것이 그가 받은 마지막 보상이었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은 아들 손약해는 남은 병사들을 모아 분의복수군(奮義復讐軍)을 조직했다. 복수를 위한 군대였다. 아버지가 세운 전공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 그 자체를 물려받아 다시 싸움터로 나간 것이다. 그도 싸우다 전사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전쟁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다. 경남 의령에 세워진 쌍절각(雙節閣)은 이 두 사람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다. 나란히 죽은 부자를 위해 나란히 세운 비각. 그것이 이들이 받은 역사의 대우였다.


김준민은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이다. 세 사람 중 기록이 가장 적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완전히 뿔뿔이 흩어진 존재만은 아니었다. 손인갑이 초계에서 전사한 뒤, 정인홍은 그의 병력을 김준민에게 넘겨줄 것을 청했고, 김준민은 그렇게 손인갑의 부대를 이어받아 싸웠다. 잊힌 이름 하나가 또 다른 잊힌 이름의 자리를 이어받은 셈이다. 전라도와 경상도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며 왜군의 서진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 알려진 거의 전부다. 언제 태어났는지, 어떤 집안 출신인지, 정확히 어떤 전투에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명확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최후만큼은 비교적 또렷하게 남아 있다.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 성이 무너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홀로 말을 달리며 싸우다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삶의 이력은 흐릿해도 죽음의 순간만은 또렷하게 기록에 남은 셈이다. 관군이 무너진 자리를, 벼슬도 없고 병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는 이들의 목숨으로 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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