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계정의 플러팅을 증거로…짝사랑의 분노를 옮긴 코믹 수사극
식당·PC방·당구장에 나타난 블랙 요원, 진지해서 더 웃긴 잠복근무
송강의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익명 제보까지 다시 보게 하는 반전
쇼츠, 릴스 등 짧은 길이의 영상물들만 소비되는 현재 가수가 곡 안에 담아낸 상징과 그들의 세계관, 서사를 곱씹어 볼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아티스트가 담아낸 ‘작은 영화’인 뮤직비디오를 충분히 음미해보려 합니다. 뮤직비디오 속 이야기의 연출, 상징과 메시지를 논하는 이 코너를 통해 좋아하는 가수의 음악을 더 깊이 이해하고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편집자 주>
마음을 설레게 했던 메시지가 수사 자료가 된다. 좋아하는 맛을 기억해 골라준 음료도, 먼저 말을 걸어온 다정함도 이제는 의심스럽다. 연인이라는 약속은 없었지만 자신을 착각하게 만든 행동은 분명히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아일릿(ILLIT)은 그 흔적들을 모아 상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일릿은 지난 26일 미니 5집 ‘브레이크 이븐’(BREAK EVEN)과 타이틀곡 ‘체포하겠어’를 공개했다. 관계에 들인 마음과 시간만큼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느낀 이들이 직접 그 관계를 끝내겠다는 앨범이다. 뮤직비디오는 이 결심을 블랙 요원들의 수사극으로 옮겼다. 여러 계정으로 플러팅을 이어간 남자를 쫓는 과정에 생활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배우 송강의 정체를 둘러싼 반전을 더했다.
아일릿 ‘체포하겠어’ 뮤직비디오 ⓒ빌리프랩
줄거리
검은 제복을 입은 아일릿이 남자가 보낸 메일과 문자를 치워버린다. 화가 난 표정의 멤버들은 수사팀처럼 모여 회의를 하고 자료를 살핀다. 자신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상대를 찾아내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멤버들이 잠복하고 조사하는 곳은 식당과 PC방, 당구장이다. 식당에서는 손님을 가로막으며 임무에 몰두하고, 다른 장소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을 받는다. 표정은 진지하지만 행동은 어딘가 엉성하다. 이동에 쓰는 차량마저 운전학원 차다.
수사에 좀처럼 진전이 없던 중 익명의 제보가 들어온다. 이를 계기로 용의자의 몽타주를 확보하면서 추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범인의 정체는 송강. 익명의 제보자로 등장했던 사람 역시 그가 변장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아일릿이 쫓던 상대와 수사에 단서를 제공한 인물이 겹쳐지면서 영상은 끝난다.
해석
노래만 들었을 때는 썸을 타는 사이의 투정처럼 느낄 수 있는 분노를 영상은 하나의 사건으로 확장하는데, 이런 긴장감을 웃음으로 바꾸는 것은 장소다. 검은 제복을 입고 작전을 논의하던 요원들이 나타나는 곳은 식당과 PC방, 당구장이다. 이들에게는 중요한 임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일상 속 갑작스러운 소동이다. 멤버들의 진지한 표정과 이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한다. 운전학원 차량도 같은 역할을 한다. 전문 요원처럼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이동 수단에는 초보 운전의 이미지가 붙어 아일릿의 귀여운 빈틈을 드러낸다.
표정과 행동을 중심으로 장면을 짧게 끊어 이어가는 편집은 이 간극을 강조한다. 임무에 몰두한 얼굴을 보여준 뒤 뜻밖의 상황이나 주변의 반응을 붙이면서 웃음을 만든다. 멤버들이 스스로 우스운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계속 진지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코믹함은 더 커진다.
마지막으로 송강의 짧은 출연은 이야기의 반전으로 기능한다. 베일에 가려진 인물을 쫓는 과정이 먼저 쌓여 있기 때문에 마지막에 탈을 벗는 몇 초만으로도 앞선 장면의 의미가 달라지는데, 그의 얼굴은 어색할 수 있는 개연성을 단번에 납득시키게 만든다.
아일릿 ‘체포하겠어’ 뮤직비디오 ⓒ빌리프랩
총평
‘체포하겠어’는 짝사랑의 실망과 분노를 유쾌한 장르극으로 풀어낸다. 아일릿은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대신 자료를 모으고 회의를 열고 직접 찾아 나선다. 관계의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앨범의 메시지가 수사라는 행동으로 표현된다.
일렉트로 팝 사운드를 채우는 호루라기는 이 설정을 귀로도 전달한다. 날카로운 신스와 톡 쏘는 보컬 효과 위로 등장하는 호루라기 소리는 경고 신호처럼 들리고, 상대를 쫓거나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드는 안무는 ‘체포’라는 말을 몸짓으로 옮긴다.
설렘의 흔적을 증거로, 모호한 관계를 사건으로 바꿔버린 ‘체포하겠어’. 아일릿은 마음을 준 자신을 탓하는 대신 상대의 행동을 따져 묻는다. 화가 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엉뚱한 웃음을 놓지 않는 방식이 이번 뮤직비디오의 매력이다.
한줄평
그 친절, 증거로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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