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충전기, 숫자만 늘리면 그만인가 [기자수첩-산업]

편은지 기자 (silver@dailian.co.kr)

입력 2026.10.27 07:00  수정 2026.10.27 07:00
G 구글 검색 선호 출처로 추가 ↗

전기차 충전기에 1.6조 넘는 보조금 투입

운영 중단 충전기 6670기, 고장 1만7800기

수치보다 중요한 건 가동률…충전기 관리감독 소홀

캐즘 지나고 어엿한 선택지로…퍼주기식 정책 바뀌어야

서울 시내 주차장 전기차 충전소. ⓒ뉴시스

전기차 배터리가 없어 충전소를 찾아갔는데 정작 충전을 할 수 없다. 화면에는 '통신 오류'라는 안내가 떠 있고, 충전기를 바꿔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다른 충전소를 찾아 이동해야 하지만 남은 배터리 잔량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전기차 운전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 상황은, 애석하게도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최근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충전업체의 폐업이나 사업 중단 등으로 운영이 멈춘 충전기가 전국에 6670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태 미확인이나 통신 이상 표시가 사흘 이상 이어진 충전기도 1만7800여기에 달했다. 충전기는 설치돼 있지만 정작 운전자가 이용할 수 있는지는 '가봐야 아는' 셈이다.


정부는 전기차 보급 확대를 위해 충전 인프라 확충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최근 6년간 민간 충전시설 설치에 투입된 보조금만 1조6695억원에 달한다. 충전 걱정에 전기차 구매를 주저하는 국민들에게 '충전기 많으니, 걱정말고 사세요'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다.


문제는 충전기 고장 자체가 아니다. 기계인 만큼 고장은 날 수 있고, 사업자의 경영 사정에 따라 운영이 중단될 수도 있다. 짚어야 할 것은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설치한 시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관리해 왔느냐다.


그동안 정부의 충전 인프라 정책은 '몇 대를 설치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충전기 보급 목표를 세우고, 설치 대수를 늘리고, 이를 전기차 이용 환경 개선의 성과로 내세웠다.


하지만 충전기가 설치돼 있다는 것과 실제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운전자에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충전소에 도착했을 때 충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집 근처에 충전기가 열 대 있더라도 절반이 고장 나 있다면 다섯 대와 다르지 않다.


충전사업자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국민 세금으로 설치비를 지원받았다면 그에 걸맞은 운영 책임을 져야 한다. 충전기는 설치하는 순간 역할을 다하는 시설이 아니라, 운전자가 실제로 충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제 기능을 한다.


정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충전사업자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어떤 불이익을 받는지, 운영이 중단된 충전기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세금으로 설치한 시설의 방치를 '사업자 사정'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이제는 충전 인프라 정책의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부터 달라져야 한다. 단순 설치 대수가 아니라 실제 가동률과 고장 복구 시간, 운영 중단 비율 등을 주요 지표로 삼아야 한다. 보조금을 지급한 이후에도 일정 기간 정상 운영을 의무화하고, 운영이 중단된 시설은 다른 사업자가 인수해 활용할 수 있도록 관리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전기차는 캐즘을 깨고 어엿한 자동차 시장의 주요 선택지로 자리 잡고 있다. 전기차를 사면 보조금을 얼마나 더 줄 것인지, 충전기를 설치하면 얼마를 지원할 것인지에만 매달리던 초기 보급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날 때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숫자를 늘리기 위한 지원이 아니라 이미 보급된 전기차와 충전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정책이다.


지금 전기차를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얼리어답터가 아니다. '통신 오류' 화면 앞에서 발만 구르는 이들이 정부에 바라는 것은 '믿고 샀으니, 후회하지 않게 해달라'는, 아주 당연한 요구에 불과하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편은지 기자 (silver@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