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구현 범위 확대·제작비 절감·세계관 확장 시도
영화 제작 현장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하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예산과 기술적 한계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장면을 만들고, 비용 부담 때문에 포기했던 이야기를 영상화하는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특히 ‘서울의 봄’ 김성수, ‘범죄도시’ 강윤성, ‘부산행’ 연상호 등 천만 영화를 연출한 감독들이 잇달아 AI 작업에 나서면서 기존 상업영화 제작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날지 관심이 쏠린다.
세 감독이 AI를 선택한 배경과 활용 방식은 서로 다르다. 김성수 감독은 오랫동안 구상해 온 장면을 구현하는 데 기술을 활용했고, 강윤성 감독은 대규모 액션 장면의 제작비를 낮추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은 본편에서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별도 콘텐츠로 확장했다. 공통점은 AI 자체를 보여주기보다 기존 제작 환경에서 마주했던 제약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김성수 감독은 현재 AI 단편영화 ‘웜 트레인’을 제작 중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회사 생활에 지친 청년 재훈이 어느 날 거대한 벌레로 변한 뒤에도 출근길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만원 지하철에서 승객들과 부딪히고 밀쳐지는 재훈의 모습을 통해 군중 속 고립감을 표현한다.
‘웜 트레인’ 스틸 ⓒ㈜크리에이티브망고
김 감독은 지난 11일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CFM)에서 작품의 일부 장면을 공개했다. 제작에는 중국의 AI 영상 생성 모델 ‘클링AI’가 활용됐다. 거대한 벌레와 수많은 승객이 뒤엉키는 장면은 기존 촬영이나 시각특수효과(VFX)로 구현하려면 상당한 비용과 기술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실제 제작 과정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김 감독은 올해 2월 작품을 구상했지만, 벌레가 승객들과 부딪히는 장면에서 충분한 무게감과 사실성을 구현하지 못해 작업을 중단했다. 이후 기술 발전에 힘입어 제작을 재개했고, 최신 모델을 활용해 해당 장면을 완성했다. AI의 성능 향상이 과거에는 구현하기 어려웠던 연출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김 감독은 AI를 활용하면서 창작 과정의 시간적 제약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울의 봄’에서는 머릿속에 구상한 장면을 실제 촬영 현장에서 확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AI를 이용하면 훨씬 빠르게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제작 과정에서 예산과 기술력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먼저 제한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고 밝혔다.
이번 작업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기존 상업영화의 협업 체계를 AI 제작에 적용했다는 점이다. 김 감독은 전문 인력으로 소규모 제작진을 꾸렸다. 류재환 VFX 슈퍼바이저가 AI 영상 총괄을 맡았으며, 미술과 편집, 음악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감독 혼자 영상을 생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영화 현장의 분업과 연출 과정을 접목한 것이다.
강윤성 감독은 AI의 활용 범위를 장편영화로 넓히고 있다. AI 장편 ‘중간계’를 선보인 데 이어 실사와 AI를 결합한 블록버스터 ‘아덴만’을 준비 중이다. 변요한이 출연하는 이번 작품은 대규모 해상 전투 장면에 생성형 기술을 활용하는 프로젝트다.
특히 대규모 전투 장면은 많은 인력과 장비, 후반작업이 필요한 만큼 제작비 부담이 큰 영역이다. 강 감독은 ‘아덴만’에 AI를 적용하면서 관련 비용을 30~40% 절감했다고 설명했다. 실사 촬영과 생성형 영상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결합하는 방식으로, AI가 기존 VFX 작업의 일부를 대체하거나 보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절감률의 정확한 산정 범위와 완성작에서의 효율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실낙원-유니버스’ 단편 필름 시리즈 ⓒCJ ENM
연상호 감독은 AI를 영화의 소재이자 창작 도구로 활용했다. 21일 개봉하는 신작 ‘실낙원’은 9년 전 실종된 아들 선우(배현성 분)가 엄마 소영(김현주 분) 앞에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소영은 그동안 AI 프로그램 ‘낙원의 아이들’을 통해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인 가상의 아들과 만나며 상실감을 견뎌왔다. 그러나 성인이 돼 돌아온 현실의 선우는 기억 속 아이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영화는 AI가 재현한 존재와 실제 인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관계를 질문한다.
연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실낙원’의 세계관을 확장한 AI 단편 시리즈 ‘실낙원-유니버스’ 4편을 약 2주 만에 제작해 공개했다. 영화 속 가상현실 기술을 활용해 세상을 떠난 가족을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내를 잃은 노인이 가상의 아내와 마주하거나, 아버지를 잃은 딸이 AI를 통해 재회하는 등 본편과 연결되면서도 독립적인 서사를 구성했다.
연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으며, 본편의 음악을 담당한 채민주 음악감독도 참여했다. ‘실낙원’ 본편은 실사로 제작됐지만, 스핀오프에는 생성형 AI를 활용했다. 별도의 촬영과 제작에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 기존 작품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확장한 사례다.
세 감독의 시도는 AI 활용이 개별 장면의 생성에 머물지 않고 기존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장편영화 연출 경험을 갖춘 감독들이 전문 인력과 협업하면서 기술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개인 창작자 중심의 실험적 작업과 차이가 있다. 제작비를 줄이는 동시에 기존 여건에서는 포기하거나 축소해야 했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다만 기술의 발전이 영화적 완성도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사실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더라도 인물의 감정과 장면 사이의 흐름을 설득력 있게 연결하는 작업은 별개의 문제다. 연상호 감독 역시 최근 AI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면서도 배우가 지닌 고유한 분위기까지 기술로 대체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외형적으로 완벽한 가상 인물을 만들 수 있더라도 실제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은 다른 영역이라는 것이다.
제작 현장의 변화도 함께 살펴볼 대목이다. AI로 일부 작업을 대체하거나 간소화할 수 있지만, 감독의 의도를 구현하고 결과물을 검토하는 과정에는 여전히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실제 김성수 감독의 작업처럼 기존 제작진과 AI 기술을 결합하는 방식이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반면 작업 효율의 개선이 기존 인력의 역할과 고용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 논의해야 할 과제다.
AI를 둘러싼 영화계의 관심은 이제 기술로 무엇을 구현할 수 있는지를 넘어, 이를 실제 제작 과정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로 옮겨가고 있다. 김성수·강윤성·연상호 감독의 작업은 아직 개별적인 시도지만, 기존 상업영화의 제작 경험을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실험이 일회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제작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는 완성작의 성과와 현장의 검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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