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짧은 이야기에서 출발한 ‘실낙원’
대작과 저예산 영화 넘나드는 연출 실험 “새로운 영혼엔 새로운 몸 필요”
올해도 연상호 감독의 행보에는 쉼이 없다. 영화 ‘군체’로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데 이어 국내 개봉 후 59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성과를 거뒀다. 일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가스인간’에는 크리에이터로 참여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번에는 직접 연출한 신작 ‘실낙원’으로 관객과 만난다. ‘실낙원’은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김현주 분)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 분)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 앞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토론토에서 부산으로’ 섹션에 초청돼 국내 관객에게 먼저 선보인 작품이다.
대규모 상업영화부터 해외 OTT 시리즈, 저예산 영화까지 제작 규모와 방식은 달랐지만, 연 감독의 관심은 줄곧 인간을 향해 있다. 이번에는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정작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운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상호 감독ⓒCJ ENM
연상호 감독의 신작 ‘실낙원’은 어머니가 쓴 짧은 이야기에서 시작됐다. 아들의 악행을 견디던 어머니가 끝내 그를 품에 안고 함께 소멸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이다. 연 감독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발전시키면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한 마을에 어머니와 아들이 사는데, 아들이 닭을 훔치고 사람을 때리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녀요. 어머니는 그 아들 때문에 고통을 겪다가 결국 아들을 품에 안고 함께 소멸하기로 결심하죠. 그 이야기를 보고 어머니가 왜 이런 인물을 썼을까 궁금했어요. 사실 저는 아들로서 어머니를 잘 모르면서도 오랫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마음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업을 시작했죠.”
어머니가 쓴 이야기는 연 감독에게 오래전 품었던 질문을 다시 꺼내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대학 시절 읽었던 문학과 철학을 떠올렸다.
“2020년 쯤부터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그동안 어머니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재미있었어요. 다만 작품을 쓰면서 내린 결론은 결국 알 수 없다는 거였어요. 타인의 심리를 100%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 시절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주인공의 심리에 관해 토론했던 기억도 떠올랐어요. 당시에는 실존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AI가 중요한 존재가 된 지금 다시 의미 있는 질문이 됐다고 생각해요. 관객들도 소영의 마지막 선택을 두고 서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대화 자체가 자연스럽게 실존에 관한 토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머니의 글을 영화로 옮겼지만, 연 감독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재능은 글보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더 선명했다.
“어머니는 1998년부터 몇 년 전까지 오랫동안 청소 노동자로 일하셨어요. 늘 자신의 노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죠. 평소 글을 쓰시는 분은 아니지만 말씀을 굉장히 재미있게 하세요. 저희 아내도 어머니 이야기를 정말 재미있어하거든요. 그런 이야기 솜씨는 어머니가 가진 역량이라고 생각해요.”
원안을 영화로 발전시키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 중 하나는 아들의 과거다. 연 감독은 선우의 행동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영화와 같은 제목을 가진 고전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전체적인 이야기를 구상할 때 밀턴의 ‘실낙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사탄이 인간을 질투하고 뱀의 몸을 빌려 이브를 유혹하잖아요. 저는 그중에서도 질투라는 감정에 주목했어요. 영화 초반에 납치범이 소영을 돌아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 시선에도 질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향한 질투죠. 납치범이 선우의 몸을 빌린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어요. 선우는 납치범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온 인물이에요.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한 거죠. 그런데 마지막에 소영이 ‘넌 내 아들이야’라고 말하면서 그 정체성에 균열이 생겨요.”
다만 선우가 납치범과 함께한 시간은 일주일에 불과하다. 그 짧은 기간이 인물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일반적인 성장 과정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교육을 받아서 생긴 정체성이라기보다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스스로를 악마로 규정한 거죠. 밀턴의 ‘실낙원’에 ‘천국에서 섬기느니 지옥에서 다스리겠다’는 사탄의 대사가 있어요. 저는 그게 굉장히 인간적인 대사라고 생각하거든요. 선우 역시 자신의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고 봤어요.”
선우는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배현성의 연기 역시 감정을 분명하게 전달하기보다 관객에게 불편한 여지를 남긴다. 연 감독에게는 그 분위기를 구현하기 위한 영화적 참고점이 있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에 마미야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굉장히 불쾌한 캐릭터예요. 그 불쾌함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처음 선우를 구상할 때도 그런 느낌을 떠올렸어요. 가장 먼저 촬영한 장면이 탄광에서 소영과 선우가 만나는 장면이었어요. 배현성 배우가 제가 생각했던 분위기를 굉장히 잘 표현해 줬어요. 그래서 그 방향으로 계속 작업할 수 있었죠.”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은 AI 선우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극 중 인공지능이 가진 정보와 능력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물었다.
“AI 선우는 실제 인격체가 아니에요. 일종의 반응만 존재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인간과 AI의 가장 큰 차이가 사색의 유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인공지능이라고 부르니까 마치 AI도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잖아요. 그런데 그 사색의 근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반응이라는 거죠. AI 선우도 실제로 무언가를 알고 이야기한 게 아니라 소영의 반응에 대응했을 뿐이에요. 우리가 AI를 이용하다 보면 이상하게 거짓말을 잘할 때도 있잖아요. 소영은 그런 반응에 영향을 받는 거죠. AI 선우 자체에는 어떤 목적이나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소영의 행동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길 여지도 있다. 오랜 시간 기다린 아들을 다시 만난 순간부터 마지막 결심까지, 인물의 감정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연 감독에게 이러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걸 설명하는 순간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간극에 가치가 있는 거죠. 저도 대학 시절에는 ‘이방인’의 메르소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니까 문득 이런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 이해가 되는 거죠. 집단지성을 통해 도출되는 보편적인 설명은 AI도 할 수 있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AI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설령 당장은 이해되지 않더라도요.”
영화 속 모자는 오랜 공백을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과정에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로 옮겨간다.
“어린 시절의 저와 지금의 제가 같은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요. 다만 그 시간을 연속적으로 지켜봤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거죠. 그런데 소영과 선우 사이에는 그 연속성이 빠져 있어요. 심지어 선우는 극단적인 사건까지 겪었고요. 두 사람을 연결하는 건 유전자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그렇다면 유전자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인격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영화의 마지막 공간은 현실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연 감독은 그곳을 구상하면서 오래전부터 품었던 낙원에 관한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예전에 미션스쿨에 다녀서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밀턴의 ‘실낙원’에 묘사된 낙원은 농경사회의 이상향에 가까워요. 씨앗만 뿌려도 작물이 풍성하게 자라는 세계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그게 의문이었어요. 매일 과실이 풍성하게 열리면 일주일만 지나도 당연하게 느껴질 텐데, 그게 정말 낙원일까 싶었거든요. 요즘은 낙원이란 사색이 없는 세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인간은 사색하기 때문에 고통도 느끼고 행복도 느끼잖아요. 반면 사색이 없다면 모든 것이 매번 즐거울 수도 있겠죠. 저는 마지막에 소영이 도달한 곳을 사색이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어요. 공간 디자인도 그런 세계를 형상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었어요.”
‘실낙원’은 복잡한 철학적 질문을 품고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비교적 직관적이다. 연 감독이 선택한 전달 방식에는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를 바라보는 태도가 반영돼 있다.
“많은 관객을 만나고 싶어서죠.(웃음) 영화가 끝난 뒤 관객들이 생각해야 할 질문은 굉장히 복잡해요. 저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 시작되는 사색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다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늘 장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도 그거예요. 이번 영화를 거창한 실존주의 영화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영화에 몰입해서 보고 자연스럽게 질문을 나눴으면 좋겠어요. 아주 쉬운 방식으로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게 장르영화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장르영화가 이야기를 쉽게 전달한다고 해서 관객에게 쉬운 사색만 남기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접근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작품이 지닌 복잡함까지 덜어질 위험은 없을까. 연 감독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영화가 아닌 자신이 오랫동안 좋아했던 음악을 꺼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라디오헤드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OK Computer’는 정말 명반이잖아요. 이후 음악들도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돌고 돌아 결국 ‘Creep’이더라고요.(웃음) 한때는 저도 팬이라는 이유로 ‘Creep’을 별로인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표현 방식이 쉽다고 해서 질문까지 쉬워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주 대중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겠어요. 물론 쉬운 방식 때문에 영화적인 재미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건 또 다른 문제겠죠. 재미를 어디까지 가져갈 것인가는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해요.”
‘실낙원’에서 기술은 가족의 문제에만 개입하지 않는다. AI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 역시 이야기의 중요한 배경이다. 연 감독은 극 중 기업의 사업 구조를 설명하면서 실제 콘텐츠 산업의 변화를 사례로 들었다.
“요즘은 사업 모델 자체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를 벌었는지가 중요했잖아요. 그런데 글로벌 OTT를 보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계속 확장해 나가요. 그 확장 자체가 기업에 큰 이익이 되는 구조인 거죠. AI 기업들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에게 서비스를 확장하는 과정 자체가 동력이 되는 거죠. 트랜스휴먼도 그런 회사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물론 제 추정이에요.”
연상호 감독 ⓒCJ ENM
김현주는 연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익숙한 얼굴이다. ‘선산’, ‘정이’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의 관계는 이번 영화에서 캐스팅이 결정되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단 연기를 굉장히 잘하는 배우예요. 제가 만들어낸 세계를 그동안 정말 잘 표현해 주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갈 수밖에 없죠. 이번 작품은 저예산 영화라 전혀 모르는 배우에게 선뜻 제안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어요. 그래서 김현주 배우에게 먼저 대본을 보여드렸어요.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한 뒤에 제안한 게 아니었어요. 이런 작품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해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렇게 김현주 배우가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영화가 시작된 거죠.”
소영은 영화 내내 여러 감정이 충돌하는 상황에 놓인다. 연 감독은 촬영 초반부터 배우가 이 복잡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탄광 장면에서 김현주 배우가 정말 좋았어요. 배현성 배우도 굉장히 잘했고요. 소영은 진짜 아들과 가짜 아들 사이에서 복잡한 감정을 겪는 인물이잖아요. 그런데 김현주 배우는 그걸 굉장히 동물적으로 표현하더라고요.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상황을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었어요. 배현성 배우의 연기와 현장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품으면서 연기하는데 굉장히 기묘하게 느껴졌어요. 거의 첫 촬영에 가까운 시기였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선우 역의 배현성은 연 감독과 이번 작품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의 인연은 앞서 작업한 ‘지옥’ 시즌2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옥’ 시즌2에서 김신록 배우의 아들로 잠깐 특별 출연했어요. 그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몰입도가 남다르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워낙 짧게 등장해서 아쉬움이 있었죠. 생각해 보니까 제 영화에 젊은 남자 배우가 등장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배현성 배우가 떠올랐고 함께하게 됐어요.”
연 감독의 작품에는 이전에 함께했던 배우들이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정민과 구교환 역시 그중 하나다. 두 배우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연 감독은 촬영장 밖에서 나누는 대화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구교환 배우는 독립영화 출신이고 지금도 여러 작업을 하고 있잖아요. 박정민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두 사람 모두 배우라는 직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러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대학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영화에 관한 고민도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이런 거 같이 해보자’는 말이 나오는 거죠. 그런 관계가 없으면 쉽지 않아요. 산업적인 이유만으로 함께할 수는 없거든요. 작업 자체가 재미있어서 함께하는 거예요.”
국내 배우들과 꾸준히 협업해 온 연 감독의 관심은 해외로도 향한다. 일본 배우와 작업한 경험을 이야기하던 그는 다음에 만나고 싶은 이름도 주저 없이 꺼냈다.
“마쓰 다카코 배우요. ‘4월 이야기’에서도 정말 좋았고 ‘고백’도 좋았어요. 최근 작품에서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요. 아오이 유우 배우와 작업하는 것도 꿈이었는데 ‘가스인간’을 통해 이뤘잖아요. 제가 쓴 대본을 아오이 유우가 연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어요.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마쓰 다카코 배우와도 꼭 한번 작업해 보고 싶어요.”
최근 연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서로 다른 제작 규모와 방식이 교차한다. 대규모 상업영화를 연출해 온 그가 상대적으로 작은 제작 환경에 다시 뛰어든 배경에는 창작자로서의 고민이 있었다.
“‘얼굴’을 만들 때는 지금까지 제가 만들어온 영화와는 영혼이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쉽지 않아요. 그래서 새로운 영혼을 만들려면 새로운 몸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롱테이크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시간이 없어서 촬영감독과 어떻게 하면 한 번에 찍을 수 있을지만 고민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영화의 미학이 결핍에서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스스로 결핍된 상황을 만들어볼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물론 저도 직업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도 중요해요. 대규모 상업영화를 만드는 방식도 사랑하고요. 여러 제작 방식을 경험하는 건 저에게 휴식이자 재충전이에요.”
새로운 제작 방식에는 시행착오도 따랐다. 특히 ‘얼굴’의 흥행 이후 연 감독이 다시 살펴본 부분은 촬영 현장보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과 맺은 계약이었다.
“‘얼굴’을 만들 때는 예산이 적으니까 다 같이 지분을 나눠 갖는 방식으로 시작했어요. 영화가 잘돼서 다들 행복했고 파티도 했죠. 그런데 막상 정산해 보니까 빈틈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일부 보너스를 추가로 마련하기도 했어요. 다음에는 그런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챙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번에는 계약 방식부터 다시 정리했어요. 막내 스태프까지 모두 지분을 받을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예산이 2억 원 정도 더 필요해지기도 했어요. 그리고 제가 상업영화를 만들던 감독이라는 이유로 독립영화 산업의 질서를 흐트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서 ‘얼굴’ 때도 독립영화 제작 지원이나 예술영화 인정 제도를 이용하지 않았고,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제작 방식을 시도했다고 해서 흥행에 대한 부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전작 ‘얼굴’의 성과는 자연스럽게 신작을 바라보는 비교 기준이 됐다.
“저는 ‘얼굴’만큼 잘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행히 해외 판매가 이뤄진 부분이 있어서 손익분기점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다고 흥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에요. 당연히 잘되면 좋죠.”
연 감독의 활동 범위는 국내 제작 현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최근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교류하면서 해외 영화산업의 제작 방식도 가까이에서 접하고 있다.
“이야기는 굉장히 많이 나눠요. 올해 초 칸에서 시간이 좀 남아서 카페에서 한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어요. 최근 느끼는 건 미국과 한국, 일본 영화산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 안에서 무언가 함께 해보자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방향이 정해진 건 아니에요.”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는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스태프와 연출을 나누는 방식도 택했다. 이 결정에는 작품의 제작 일정과 기존 협업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
연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인간이 익숙하게 믿어온 질서가 무너지는 세계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런 이야기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이유를 묻자 그는 특정한 시대나 사회를 넘어서는 오래된 관념을 이야기했다.
“인간은 낙원에서 쫓겨나 영원히 낙원을 그리워하는 존재잖아요. 이건 인류가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데아와 미메시스, 정토와 예토의 관계도 그렇고요. 어느 문화권에나 이상향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비극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생각들이 장르적으로 발전한 형태가 디스토피아 영화라고 생각해요.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일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제가 현실을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건 아니에요. 저는 행복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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