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는 영재 발굴·정몽구 재단은 장학금…성장 단계별 지원
삼성은 300년 된 명기 대여…피아노 조율사 양성까지
후원액 7.4% 줄었지만 참여 기업 24% 늘어…방식 세분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지난해 예술의전당 인춘아트홀과 IBK챔버홀에서 ‘온드림 아티스트 시리즈’와 ‘온드림 실내악 시리즈’를 열어 장학생과 출신 아티스트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있는 모습.ⓒ현대차 정몽구 재단
연주자 한 명이 세계 무대에 서기까지 기업 몇 곳의 손을 거칠까. 첼리스트 한재민의 이력을 따라가면 적어도 세 곳의 이름이 차례로 나온다. 어린 시절 금호문화재단의 영재 무대에 섰고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장학생으로 성장했다. 2023년에는 삼성문화재단의 악기 후원 대상으로 선정돼 1697년산 그란치노 첼로를 빌렸다.
지난 6월 강원 평창의 산골 마을 계촌리에서 열린 정몽구 재단의 클래식 축제에서도 그는 무대에 올랐다. 생상스 첼로 협주곡 1번을 협연한 뒤 오케스트라 첼로 파트에 합류해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을 함께 연주했다. 여러 기업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연주자가 다시 지역 관객 앞에 선 장면이다.
재계의 클래식 후원을 들여다보면 이처럼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뉘는 모습이 보인다. 기업들이 미리 협의한 것은 아니지만 영재 무대와 장학금, 악기 대여에 각자 집중하다 보니 한 연주자의 성장 단계마다 다른 기업의 손길이 닿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후원 규모보다 눈에 띄는 건 지원 방식의 변화다. 한국메세나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 총액은 약 1969억원으로 전년보다 7.4% 줄며 3년 만에 감소했다. 클래식 분야 지원액도 4.8% 줄었다. 반면 후원에 나선 기업은 728개로 24% 늘었고 지원 건수도 2392건으로 28.5% 증가했다. 전체 지원액은 줄었지만 참여 기업과 지원 건수는 늘어난 것이다.
고(故)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의 유족이 지난 8월 서울 서대문구 금호아트홀 연세 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증식에서 고인의 바이올린을 금호문화재단에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차녀 이수정, 장녀 이영, 금호문화재단 서재환 이사장.ⓒ금호문화재단
출발선은 금호…영재 무대부터 '자기 PR'까지
분업의 첫 단계는 발굴이다. 금호문화재단은 이 분야의 대표적인 후원 기관이다. 1998년 시작한 금호영재콘서트 무대에 섰던 연주자 명단에는 조성진과 손열음, 한재민의 이름이 있다. 1993년 문을 연 금호악기은행은 고가 악기를 빌려주는 창구다.
지난 8월 이 악기은행에 특별한 바이올린이 들어왔다.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로 불렸던 고 김남윤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가 생전에 쓰던 악기다. 평생 제자를 길러낸 스승의 바이올린을 유족이 기증했다. 재단은 오디션이나 자체 심사 등을 거쳐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무상으로 빌려줄 계획이다.
최근에는 연주 외적인 역량을 키우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매니지먼트스쿨'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이 무대 밖에서도 자신의 경력을 관리하고 활동 기반을 넓히는 데 필요한 교육을 제공한다. 뛰어난 연주 실력뿐 아니라 자신을 알리고 활동 기회를 만들어가는 역량도 중요해졌다는 판단에서다.
성장은 정몽구 재단…폐교 위기 마을을 클래식 무대로
다음 단계는 성장이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은 2011년부터 문화예술 장학생을 지원해 왔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재단 장학생 출신이다. 국제 콩쿠르 참가와 해외 연수도 돕는다.
지난달에는 재단 장학생인 피아니스트 이정우가 제오르제 에네스쿠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특별상 5개를 휩쓸었다. 같은 대회에서 첼리스트 박상혁도 3위에 올랐다.
재단은 장학생들이 설 무대도 직접 만든다. 계촌마을은 2009년 초등학교가 폐교 위기에 몰리자 전교생으로 오케스트라를 꾸렸던 곳이다. 이후 마을의 음악 활동이 클래식 축제로 발전하면서 임윤찬과 조성진, 백건우 등이 오른 무대가 됐다. 올해 12회째 축제에는 사흘간 1만6000여명이 찾았고 누적 방문객은 15만명을 넘었다. 장학금을 받고 자란 음악가가 다시 시골 마을 무대에 서는 선순환이다.
지난 2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2026 삼성 피아노 톤 마이스터 프로그램' 지원 협약식에서 서인수(왼쪽) 한국피아노조율사협회 회장과 류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악수하고 있다.ⓒ삼성문화재단
악기는 삼성…300년 된 명기에서 피아노 조율사까지
실력이 무르익은 연주자에게 필요한 건 좋은 악기다. 삼성문화재단은 2023년 기준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 델 제수 등 명품 현악기 7대를 보유했다. 개인이 소장하기 어려운 명기들이다. 재단은 '삼성 뮤직 펠로우십'을 통해 젊은 연주자들에게 악기를 최대 5년간 무상으로 빌려주고 보험료와 유지·관리비도 지원한다.
2023년 후원 대상으로 선정된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는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대여받았다. 비올리스트 이해수는 올해 3월에도 재단이 빌려준 1590년산 가스파로 다 살로 비올라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개됐다. 수백 년 된 명기들이 젊은 연주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사업은 고 이건희 선대회장 시절인 1997년 시작됐다. 리처드 용재 오닐과 클라라 주미 강 등도 이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았다. 오는 25일은 이 선대회장의 6주기다.
삼성은 무대 뒤도 챙긴다. 피아니스트의 숨은 조력자인 조율사를 2017년부터 지원해 왔다. 지난 6월 평창 알펜시아에서 열린 기술 세미나에는 국내외 조율사 300여명이 모여 독일 스타인웨이 전문가에게 콘서트 피아노 조율 노하우를 배웠다. 국내 우수 조율사 20명은 별도의 심화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좋은 연주를 위해서는 악기를 최상의 상태로 관리하는 전문인력도 필요하다는 취지다.
자연스러운 역할 분담…연주자 성장 따라 이어지는 후원
금호가 영재 무대를 마련하고 정몽구 재단이 성장을 돕는다면 삼성은 연주에 필요한 명기를 지원한다. 기업들이 사전에 역할을 분담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연주자의 성장 단계마다 서로 다른 기업의 지원이 이어지는 구조가 형성됐다.
계촌 무대에서 협연자와 오케스트라 단원을 오간 한재민의 사례는 이러한 후원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각자의 방식으로 쌓아온 기업들의 지원이 한국 클래식 음악가들의 활동 기반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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