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이란 전쟁 장기화에 호르무즈 기능 ‘마비’
정부, 공급망 다변화로 에너지난 해법 모색
수입국만 늘려서는 공급 중단 충격 못 막아
입법조사처 “회복탄력성 중심으로 체계 전환해야”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뚫고 200만 배럴의 원유를 실은 유조선 유니버설호가 울산 남구 울산항 원유부이로 정박하고 있다.ⓒ뉴시스
국회입법조사처가 호르무즈 해협 위기를 계기로 에너지 안보 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수입국 수를 늘리는 양적 다변화만으로는 물리적 공급 중단 충격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발간한 ‘호르무즈 위기가 드러낸 한국의 에너지 공급망 한계와 과제’ 보고서를 통해 이번 사태가 과거 유가 상승 위주 충격과 달리 에너지와 기초 산업원료 전반의 물리적 조달 차질로 번진 복합 공급망 위기였다고 짚었다.
전쟁 직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와 석유제품 물동량이 급감하고 카타르산 액화천연가스(LNG) 공급이 막히면서, 필요한 물량을 제때 들여오지 못하는 조달 위험이 현실화했다는 분석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셰일 혁명 이후 원유와 LNG 생산·수출을 늘리며 글로벌 공급축이 다극화하고 있다. 다만 아시아 수입국의 중동 의존도는 여전히 구조적으로 고착돼 있다.
전 세계 에너지 수요 중심이 아시아로 쏠리는 가운데 2025년 기준 호르무즈를 지나는 원유·석유제품의 약 80%, LNG의 약 90%가 아시아로 향했다.
특히 석유화학 핵심 원료인 나프타와 액화석유가스(LPG)는 걸프 지역 수출량의 상당수가 한국과 일본으로 집중 유입됐다.
한국의 원유 공급국은 2024년 기준 18개국으로 일본(9개국)보다 많고 수치상 다변화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인 위험 노출도는 그대로다.
여전히 원유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이 중 90% 이상이 단일 해상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경유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 정유사들은 가격이 저렴한 중동산 중질·고유황 원유를 정제해 수익을 내는 고도화 설비에 최적화돼 있어, 위기 시 미국산 경질유 등으로 공급선을 급격히 바꾸면 경제성이 떨어진다.
LNG 역시 장기계약 비중이 높다. 의무 인수 조항이나 도착지 변경 금지 조항 등 계약상 경직성이 커 신속한 물량 전환이 어렵다.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UAE)의 우회 육상 파이프라인 수송 능력도 호르무즈 전체 통과량의 18~28% 수준에 불과하다. 드론 공격 등에 노출돼 대체 능력은 제한적이다.
결국 기반 시설, 계약, 지리적 요인이 얽혀 대체 공급원으로 즉각 전환하지 못하는 ‘구조적 락인(Lock-in)’ 상태에 놓여 있다는 지적이다.
세계 최대 석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석유시설. ⓒAP/뉴시스
보고서는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 공급망 취약성을 엄중히 짚었다.
국내 정유 공정의 나프타 수율은 20% 수준에 그쳐 내수 수요의 45%를 수입에 기대고 있다. 이 가운데 77%가 중동산이다. 54%는 호르무즈 해협을 거친다.
호르무즈 통항 차질이 곧바로 플라스틱, 포장재, 자동차, 전자 소재 등 전방 제조업 전반의 조달 마비로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행 법정 의무비축 체계에는 나프타 등 기초 산업원료가 빠져 있어 사후 수급 조절에만 매달리는 실정이다.
정부는 200일분 이상의 정부 비축유를 확보해 단기 유가 방어에는 선방했다. 다만 일본과 비교할 때 완충 역량에서 현격한 격차를 보였다. 일본은 중동 의존도가 90%를 넘음에도, 자원 자주 개발률이 42.1%에 달한다. 특히 산유국과의 공동 비축을 통한 우선 구매권을 확보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 자주 개발률은 10%대 초반대다.
입법조사처는 향후 에너지 안보 정책이 수입국 늘리기를 넘어 위기 시 충격을 견디는 ‘완충 자산’과 ‘전환 옵션’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체적인 입법·정책 과제로 먼저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과 ‘국가자원안보 특별법’ 개정을 제시했다. 나프타 등 전략 산업원료를 법적 비축 대상에 포함하고, 위험도에 따른 차등 비축 목표와 단계적 비축·방출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또한 ‘조세특례제한법’을 손질해 정유업계가 비중동산 초중질유를 처리하거나 다양한 유종을 다룰 수 있도록 돕는 전환 설비 투자에 대해 통합투자세액공제 우대공제율을 적용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유가 중심 위기경보 체계를 벗어나 해상운임, 나프타 스프레드, 민간 재고량, 대체 항로 확보 여부 등 실물 공급망 지표를 유기적으로 반영하는 조기경보 시스템 구축도 촉구했다.
대외적으로는 동아시아 주요 수입국 간 LNG·원유 스와프와 공동 비축 협력을 강화하고, 상류 자원개발 투자 시 유사시 국내로 물량을 가져올 수 있는 우선매수권 및 비상인도 조항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발맞춰 석유·가스를 ‘징검다리 전환 자원’으로 관리하고, 바이오 기반 원료 전환과 공정 혁신을 병행해 대외 의존도를 낮춰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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