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로봇회사에 1조 가까이 베팅…정 회장의 첫 대형 M&A
누적 순손실 1.7조에도 증권가는 몸값 128조~146조 추산
2028년 아틀라스 공장 투입…'로봇 승부수' 본게임 시작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지난 7월 27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주 피라시카바에 위치한 현대차 브라질공장을 방문해 차량 품평을 진행하고 있다.ⓒ현대차그룹
연매출 200만 달러에 순손실 1억300만 달러. 현대자동차그룹이 1조원 가까이 들여 사들인 로봇회사의 인수 직전 성적표였다.
2020년 12월 11일 현대차그룹은 미국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나믹스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그룹 회장에 오른 정의선 회장이 두 달 만에 내린 첫 대형 인수합병(M&A) 결정이었다. 소프트뱅크그룹으로부터 지분 80%를 사들이는 거래로 당시 보스턴다이나믹스의 기업가치는 11억 달러(약 1조2000억원)로 평가됐다. 현대차(30%)·현대모비스(20%)·현대글로비스(10%)가 나눠 맡았고 정 회장은 2억2000만 달러(약 2400억원)의 사재를 들여 20%를 직접 사들였다.
시장의 시선은 차가웠다. 보스턴다이나믹스는 사족보행 로봇 '스팟'과 이족보행 로봇 '아틀라스' 영상으로 유명했지만 돈을 버는 회사는 아니었다. 순손실은 1년 새 60% 넘게 불어난 상태였다. 블룸버그는 앞선 주인인 구글과 소프트뱅크가 이 회사에 해마다 각각 6000만 달러와 2억 달러가량을 쏟아부은 것으로 추산했다. 기업이라기보다 연구소에 가깝다는 평가가 따라붙었고 국내에서도 정 회장이 '적자 로봇벤처'의 투자 리스크를 짊어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인수 이후에도 적자는 이어졌다. 거래가 마무리된 2021년 1970억원이던 순손실은 지난해 5284억원으로 불어났다. 5년간 쌓인 누적 순손실은 1조7558억원에 달한다. 그래도 현대차그룹은 유상증자로 꾸준히 자금을 대며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매출은 2021년 668억원에서 지난해 1501억원으로 2배 넘게 늘었다. 지난해에는 매출이 29% 늘며 손실 증가율(20%)을 앞질렀다.
아틀라스가 신규 로봇 핸드로 드릴 비트를 장착하고, 드릴을 조작하고 있다.ⓒ보스턴다이나믹스
안방 시장이 만든 몸값
6년 가까이 흐른 지금 평가는 뒤집혔다.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2026에서 공개된 아틀라스는 글로벌 IT매체 씨넷이 뽑은 '최고 로봇상'을 받았다. 같은 자리에서 보스턴다이나믹스는 구글 딥마인드와 손잡고 제미나이 로보틱스 AI 모델을 아틀라스에 접목한다고 발표했다.
증권가의 재평가도 잇따랐다. 올해 초 KB증권은 장기 휴머노이드 시장 전망을 토대로 보스턴다이나믹스의 기업가치를 약 128조원으로 추산했다. 한화투자증권은 테슬라와 비교해 약 146조원으로 평가했다. 추정치대로라면 인수 당시 몸값의 100배가 넘는다.
해마다 수천억원씩 적자를 내는 회사가 장기적으로 100조원대 평가를 받는 이유는 현대차그룹이라는 든든한 잠재 수요처에 있다. 현대차그룹은 수년 안에 현대차·기아 사업장에 아틀라스 2만5000대를 배치할 계획이다. 외부 고객을 찾아 나서야 하는 휴머노이드 스타트업들과 달리 보스턴다이나믹스는 세계 3위 완성차 그룹의 공장을 안방 시장으로 품고 출발하는 셈이다.
원가도 내려갈 여지가 크다. 5만대 규모로 양산하면 현재 대당 13만~14만 달러로 추정되는 제작비가 3만 달러 수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전문가 전망도 나온다. 미국에는 연간 3만대를 만드는 로봇 공장도 세운다. 삼성증권은 외부 고객이 늘어날수록 보스턴다이나믹스의 가치가 더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양산 비용을 낮추고 외부 고객을 확보해 수익성을 입증하는 건 남은 숙제다. 내년 기업공개(IPO)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결국 기업가치 평가를 좌우할 변수는 로봇의 실제 공장 투입 규모와 상용화 속도다.
보스턴다이나믹스 아틀라스가 로보틱스 메타플랜트 응용 센터(RMAC)에서 자동차 제조 작업을 학습하고 있다.ⓒ보스턴다이나믹스
공장에서 일 배우는 아틀라스
계획은 이미 현장으로 옮겨갔다. 아틀라스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안에 실제 자동차 생산환경을 재현한 '로보틱스 메타플랜트 응용센터(RMAC)'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6월 시범 운영을 거쳐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정식 문을 연 곳이다. 센터 규모는 내년 지금의 10배로 커진다. 2028년에는 부품을 조립 순서대로 배치하는 서열 작업에 투입되고 2030년에는 조립까지 맡는다.
진용도 새로 갖췄다. 이달 7일에는 아마존에서 AI 비서 알렉사와 범용인공지능(AGI) 개발을 이끈 로히트 프라사드가 새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 소프트뱅크가 올해 7월 남은 지분 약 10%에 대한 풋옵션을 행사하면서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나믹스 지분 100% 확보에도 나섰다.
이 긴 베팅을 버틴 힘은 본업에서 나왔다. 정 회장이 취임한 2020년 4조8478억원이던 현대차·기아 합산 영업이익은 2024년 26조9067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찍었다. 미국 관세로 7조원 넘는 비용을 떠안은 지난해에도 20조5460억원을 냈다. 같은 기간 판매량은 15% 가까이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4배 넘게 뛰었다. 판매 증가뿐 아니라 고부가가치 차종 확대 등 수익성 개선이 실적 성장을 이끌었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처음 오른 글로벌 판매 3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미국 오토모티브뉴스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주는 상을 도요다 가문 등과 나란히 받았다.
정 회장은 14일 취임 6주년을 맞는다. 인수 당시 '왜 샀느냐'는 물음표가 붙었던 로봇회사는 이제 현대차그룹의 다음 6년을 여는 열쇠가 됐다. 시장의 관심도 흑자 전환 시점보다 로봇이 공장에 서는 속도로 옮겨갔다. 취임 두 달 만에 던진 승부수가 자동차 회사의 정체성을 바꾸고 있다. 아틀라스가 공장 생산라인에 들어서는 2028년, 정 회장의 첫 베팅은 마침내 패를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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