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범죄·집단학살 처벌 이바지 공로…유엔 북한인권조사위 설립 주도
지난해 9월16일 유엔 독립국제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조사한 나비 필라이 국제사법재판소 임시 재판관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조사 결과 집단학살을 저질렀다고 설명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올해 노벨평화상은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인권운동가이자 국제법 전문가 나비 필라이(85) 국제사법재판소(ICJ) 임시 재판관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노르웨이 오슬로 노벨연구소에서 세계 평화 증진과 국제법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필라이 재판관을 202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노벨위원회는 그가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 제노사이드(집단학살)가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법관들이 제재를 받고 그 기관들이 공격받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용기와 비전, 결단력을 갖춘 인물이 필요하다”며 “이는 바로 나비 필라이가 재판석에서 보여준 자질”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노벨위원회는 선정 발표문에서 국제법 질서가 처한 위기를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로 지적했다. 노벨위원회는 “항구적인 평화는 강자의 의지나 불안정한 세력 균형이 아니라 법의 원칙 위에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군사력과 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법과 사법 제도를 통해 평화를 추구해 온 그의 활동이 올해 수상자의 핵심 배경이라는 것이다.
필라이 재판관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맞서 싸운 인권 변호사로 출발해 세계적인 국제법 전문가로 성장한 인물이다. 평생 전쟁범죄와 제노사이드, 인종차별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추적하며 ‘법을 통한 평화’를 실천해왔다.
1941년 남아공 더반의 인도계 타밀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탈대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1967년 나탈주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본격적인 법조인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남아공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 탓에 흑인 여성 법률가의 활동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정치범과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더욱이 넬슨 만델라가 수감됐던 로벤섬 교도소의 정치범들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보다 인간적인 수감 환경을 확보하는 데 힘썼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에서 법학석사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5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여성 고등법원 판사에 올랐다.
같은 해 르완다 집단학살과 관련한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설치한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판사로 선출된 그는 국제법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르완다 집단학살 재판 과정에서 조직적인 성폭력이 제노사이드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법리를 확립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폭력을 전쟁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범죄가 아니라 국제 사회가 반드시 처벌해야 할 중대 범죄로 명확히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필라이 재판관은 이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을 거쳐 2008년부터 2014년까지는 유엔 인권최고대표를 맡아 시리아 내전과 각국의 인권침해 문제에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 시절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북한 인권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설립을 주도했다. 2017년 방한 당시에는 “일본군 위안부와 북한 인권문제는 정치·외교적 문제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라며 “한국이 북한 주민과 탈북민의 인권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팔순에 들어선 뒤에도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19년부터 국제사법재판소 임시 재판관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지역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조사하는 유엔 독립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조사를 이끌었다. 현재 미얀마의 로힝야족에 대한 제노사이드 사건을 다루는 국제사법재판소의 임시 재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 자료: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연합뉴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젊은 흑인 여성 변호사에서 국제사법 정의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매김한 필라이 재판관의 60여년 삶을 관통하는 원칙은 매우 단순하다. 인종과 성별, 국적을 막론하고 누구든 법 앞에서 동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는 상금 1200만 스웨덴 크로나(약 16억 1000만원)와 메달, 증서를 받는다.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는 지난 5일 생리의학상 수상자 공개를 시작으로 물리학상과 화학상, 문학상 등 순서로 이뤄졌고, 오는 12일 경제학상 수상자 발표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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