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쓰는 신약, 한국선 못 쓴다"…환자 희망 꺾는 '급여 문턱'

한보라 기자 (simplyh@dailian.co.kr)

입력 2026.06.29 14:02  수정 2026.06.29 14:09

치료제 사용에 美 4개월·日 18개월…한국은 2년

빅파마는 '철수 카드' 만지작, 국내사는 R&D 위축

해당 이미지는 AI로 제작됨.

미국과 유럽에서 이미 처방되고 있는 혁신 신약이 국내 환자에게는 좀처럼 닿지 못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고도 건강보험 급여 단계에서 막혀 시장에 풀리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면서다. 까다로운 급여 문턱 탓에 제약사들이 신약 도입과 개발을 주저하면서 국내 환자들만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실정이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달 제5차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에서 국산 첫 키메라항원수용체 T세포(CAR-T) 치료제인 큐로셀 '림카토주'의 급여기준을 설정하지 않았다. 한국노바티스의 조기 유방암 치료제 '키스칼리정'도 문턱을 넘지 못했다. 암질심은 항암제의 건강보험 등재 여부를 가르는 첫 관문이다.


문턱은 높고 절차는 까다롭다. 5차 암질심에서 한국릴리의 '버제니오정'은 세 차례 고배 끝에 7년 장기 추적 데이터를 확보하고서야 급여 확대에 성공했다. 반면 키스칼리는 환자 생존 기간 연장을 입증할 장기 데이터가 부족해 탈락했다. 림카토 역시 임상 근거가 해외 학술지에 충분히 게재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급여 여부는 곧 매출과 직결된다. CAR-T 치료제 '킴리아'는 건강보험 적용 전 1회 투약 비용이 약 4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2022년 급여 등재 이후 환자 본인 부담금이 최대 600만원 안팎으로 낮아졌다. 약값의 대부분을 건강보험이 부담하면서 시장에서 팔리는 약이 된 것이다. 반대로 급여를 받지 못하면 4억원이라는 가격표 탓에 사실상 처방이 어렵다. 허가를 받고도 급여 문턱을 넘지 못해 '안 팔리는 약'으로 남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이유다.


신약 도입 지연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분석 결과 2021년 이후 등재된 항암제 32개는 식약처 허가에서 건강보험 등재까지 평균 1년 10개월이 걸렸다. 희귀질환 치료제 20개는 평균 2년 11개월이 소요됐다. 같은 약을 미국에서는 4개월 만에 쓴다. 일본도 18개월이면 쓴다.


글로벌 빅파마는 한국의 급여 불확실성을 출시 전략의 변수로 본다. 실제로 한국로슈는 폐암 표적치료제 '가브레토'가 급여 진입에 실패하자 올해 4월 공급을 중단하고 국내 시장에서 철수했다. 한 글로벌 빅파마 관계자는 "허가 이후 급여까지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면 글로벌 본사가 한국의 출시 우선순위를 뒤로 미룰 수 있다"며 "이미 한국의 신약 접근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밑도는 수준"이라고 했다.


국내 제약사의 셈법은 더 복잡하다. 신약 후보물질을 직접 끝까지 개발하자니 약을 팔아 수익을 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여기에 올해 하반기 약가 인하가 구조적 부담을 더했다. 정부는 14년 만의 약가제도 개편으로 오는 7월부터 복제약(제네릭) 가격 인하를 결정했다. 판권을 가진 오리지널 의약품 가격 대비 53.55%이던 산정률을 40%대까지 낮추는 것이다. 복제약 수익을 줄여 그 재원을 혁신 신약 개발로 돌린다는 구상이다.


제네릭에서 번 돈으로 R&D 사업을 영위해 온 업계로선 발밑이 흔들리는 셈이다. 7개 제약·바이오 단체가 꾸린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번 약가 인하가 산업 기반을 위협한다고 반발해왔다. 지난해 말 비대위가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정회원사 59곳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약가 인하 이후 연구개발(R&D) 자금이 평균 25.3% 줄어들 것으로 조사됐다.


당시 윤웅섭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이사장(일동제약 회장)은 "올해 채용과 R&D 예산을 모두 비상경영 체제에 맞춰 재편했다"며 "약가 인하가 이익 감소가 아니라 사업의 지속 가능성 문제로 현장에 와닿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약가 인하에 대한 보완책으로 내민 '100일 신속등재'도 한계가 뚜렷하다. 식약처 허가부터 건보 급여 적용까지 240일가량 걸리던 기간을 100일 이내로 단축하겠다는 제도다. 문제는 사후 평가 방식이다. 약을 먼저 건강보험에 올린 뒤 실제 치료 효과를 평가해 약값을 다시 정하는 구조다.


또 다른 글로벌 빅파마 관계자는 "사후평가에 따른 약가 조정과 환급 구조가 불확실하면 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한 국내 제약업계 관계자도 "재정 절감을 위한 약가 인하를 넘어서야 한다"며 "제약산업이 지속 성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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