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보다 회사·IP가 먼저 언급되는 시대
창작자 개성보다 검증된 공식 우선시
산업 근간은 '독창적 재미'…실패 포용 필요
AI로 제작한 이미지.
얼마 전 좋은 기회로 게임업계 1세대 개발자를 만나 이야기할 자리가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업계 원로가 바라보는 산업의 현주소가 가장 궁금했다. 글로벌 시장 경쟁 격화로 곳곳에서 우리 게임 산업이 위기라고 하는데, 과연 산증인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시스템? 제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사람'이었다.
"요새 이용자들이 알고 있는 게임 개발자 이름이 몇이나 되냐. 지금도 영화 쪽은 누구 감독이라고 하면 바로 나오는 게 있다. 사람 중심이다. 하지만 게임 업계에 사람이 안 등장한 지가 오래됐고 회사 이름만 나온다. 자기 색깔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분들이 과거보단 확실히 적어졌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개성이 나오지 않고, 또 똑같은 게임이 나오는 거다.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업체가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산업에서는 여전히 감독의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로 작동한다. 관객들은 봉준호 감독의 신작이라고 하면 사회 비판과 블랙코미디가 어떻게 녹아들었을지 기대하고,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라면 특유의 미장센과 연출을 떠올린다. 작품이 공개되기 전부터 창작자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관람 이유가 되는 셈이다.
해외 게임업계에는 '데스 스트랜딩'의 코지마 히데오나 '엘든 링'의 미야자키 히데타카 같은 개발자가 있다. 이들은 단순히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경험과 세계관을 기대하게 만드는 '브랜드'다.
국내 게임업계에도 한때 개발자 이름이 곧 브랜드였던 시절이 있었다. '바람의 나라', '리니지'의 아버지로 불리는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창업자,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화이트데이' 등을 개발한 이원술 손노리 대표, '라그나로크'의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 '거상', '임진록'을 만든 김태곤 레드징코게임즈 대표 등이 그렇다.
어떤 사람이 만들었는지에 따라 이용자들의 기대감이 달라졌고, 새로운 작품이 공개되면 그의 개발 철학과 개성이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게임은 회사가 아닌 사람이 만드는 창작물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작이 공개되면 개발자보다 회사 이름과 IP(지식재산권)가 먼저 언급된다. 이용자들은 어떤 게임이 어느 회사에서 출시됐는지는 알아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임을 만드는 사람보다 서비스 일정과 매출 순위, 과금 체계가 더 큰 관심사가 됐다.
최근 만났던 또 다른 업계 고연차 종사자는 "예전에는 누가 만든다고 하면 기대하는 작품의 수준이나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치 않다"고 아쉬움을 곱씹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게임 개발 규모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수십, 수백 명이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일반화됐고, 특정 개인의 이름만으로 작품을 설명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에 커뮤니티와 유튜브,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중심으로 이용자 여론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개발자가 과도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도 잦아졌다. 논란이 발생하면 회사보다 특정 개발자가 먼저 공격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환경에서 개발자들이 전면에 나서기를 주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검증된 성공 공식을 반복하게 된다. 새로운 시도보다 이미 성공한 장르와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이 안전하다. 창작자의 이름보다 조직과 데이터가 우선되는 산업에서 개성이 강한 작품이 나오기 어려운 이유다.
우리가 다시 스타 개발자를 만나려면 어떤 바탕이 만들어져야 할까. 산업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성공 사례를 만들기 위해서는 창작자의 이름과 철학이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실패에 대한 책임만 묻고 도전에 대한 가치는 인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독창적인 재미를 제공하는 참신한 게임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창작자의 이름이 사라진 현시대에서 새로운 명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 게임업계가 한 번쯤 고민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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