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연출도 겸한, 러닝타임 짧은 독립 장편이라는 소개를 듣고 어렴풋이 떠올린 건 '형식적인 인디 영화'에 가까웠다. 실제로 1부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이게 영화인지, 브이로그인지, 다큐멘터리인지 헷갈릴 만큼 거칠고 느슨하다. 그런데 무건(김무건 분)이 충길(김충길 분)에게 고백을 건네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조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마음, 실연의 여운, 그럼에도 다시 사람에게 기대보는 용기까지. '고백하지마'는 우연처럼 흩어져 있던 장면들을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 류네
영화 '고백하지마'는 '하나, 둘, 셋, 러브' 촬영이 끝나고 뒤풀이처럼 모인 펜션에서 충길이 현경(류현경 분)에게 느닷없이 고백을 하면서 벌어지는 상황들을 담았다. 세 달 뒤 부산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마주한 두 사람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며 관계의 어색함과 설렘, 좌절과 위로가 뒤섞인 로맨틱 코미디다.
카메라는 한쪽에 세워진 채 배우들의 수다, 농담, 민망한 침묵까지 통째로 담아낸다. 롱테이크 장면이 이어지니 관객 입장에서는 '이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를 비로소 움직이는 건 무건이다. 현경과 충길 사이에는 고백으로 인한 어색함이 자리하는데 그 와중에 무건이 충길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영화는 직접적인 거절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비 내리는 펜션의 마당에서 두 사람이 함께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을 보여준다.
류현경은 이 씬을 '1부의 중요한 좌절 포인트'라고 말한다. 현경과 충길, 충길과 무건. 서로에게 분명히 마음은 건넸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세 사람의 감정이 그 한 장면에 겹쳐진다. 관객에 따라 웃음이 나올 수도 묵직한 씁쓸함이 남을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후 2부는 고백 사건으로부터 3개월이 지난 시점으로 배경을 부산으로 옮긴다. 현경은 지인의 부탁으로 강연을 하러 내려가 관객들의 다소 무례한 발언에 시달리고, 충길은 옷가게에 취업했다가 하루 만에 잘린다. 각자 나름의 생존을 위해 버티는 사이 두 사람은 계속 동선이 겹치지만 끝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다 한 라이브 카페에서 마침내 마주 앉게 된다.
그 재회의 장면이 인상적이다. 드라마틱한 고백도, 격렬한 화해도 없다. 그냥 오랜 친구처럼 근황을 나눌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기서 작은 힐링이 생긴다. 이 영화가 결국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사람에게 다시 기대보는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고백하지마'의 1부는 분명 호불호가 갈릴 법하다. 기승전결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촬영도 러프하다. 저예산 독립영화 특유의 질감이라기보다 정말 친구들끼리 카메라 하나 놓고 찍은 브이로그에 가까운 순간들도 있다. 그러나 2부 부산 파트에서는 다소 정돈된 연출이 드러난다. 현경과 충길이 같은 동선을 반복하지만 엇갈리다가 결국 만나는 구성이 우연이 모이면 운명이 된다는 서사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영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건 음악이다. 김오키의 곡들이 영화 곳곳에 배치돼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하이가 피처링한 '안녕'이 마음 속에 오래 남는다. 무건이 충길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사랑 고백이기도 하고, 포기 선언이기도 한 말들이 노랫말과 겹치며 장면 자체를 하나의 짧은 뮤직비디오처럼 만든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1부의 서사를 이끌던 무건의 이야기가 2부에서는 사실상 사라지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가장 강하게 와닿는 축이었기에 부산 파트에서 한 번쯤 더 언급되거나 이후 서울에서 짧은 재회 정도가 있었다면 서사가 더 탄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류현경 역시 이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 보니까 '무건이랑 충길이가 마지막에 한 번 더 만나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면서도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다시 찍기 어렵기도 했고, 그래서 '이건 2편으로 찍자' 하고 웃으면서 넘겼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하지마'는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는 영화다. 1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큰 사건도, 화려한 장면도 없다. 대신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또 사람 덕분에 버티는 시간들을 보여준다.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에 문득 '나도 저런 날이 있었지'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품이다. 러닝타임 69분,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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