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끝이라고 여겼던 순간, 각본가 이(심은경 분)는 우연히 발걸음이 닿은 설국의 여관에서 다시 시작을 맞이한다. 2025년 겨울 개봉을 앞둔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여행과 나날'은 미세한 기류와 여백 속에서 변화의 징후를 포착하며, 일상 여행자들이 스쳐 지나가는 시간 위에 꿈결 같은 정서를 새긴다.
로카르노·토론토·부산·로테르담 등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꾸준히 초청받으며 작가적 시선을 인정받아온 미야케 쇼는 일상과 관계, 상실과 회복의 감정을 가장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길어 올리는 연출가다. 화려한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과 흐름을 좇아온 그의 세계는 이번 작품에서도 바람과 계절, 그리고 1:1.37 화면비 같은 영화적 장치를 통해 한층 응축된 형태로 펼쳐진다.
ⓒ엣나인필름
제78회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을 계기로 국제적 존재감을 다시금 확인한 '여행과 나날'은 미야케 쇼가 지향해온 '일상의 깊이'를 집약한 작품이기도 하다. 장소와 거리의 운치, 시간의 미묘한 결을 읽어내는 그의 작업 방식은 인물의 심리와 영화의 정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한국과의 인연 또한 이번 작품에서 한층 깊어졌다. 9월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을 통해 첫 공개된 데 이어, 서울독립영화제의 마스터클래스와 개봉 프로모션 일정으로 다시 한국 관객을 찾은 그는 "관객의 질문 하나하나가 창작자로서의 감각을 다시 깨운다"고 말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한국 관객을 만난다는 기대와 즐거움이 컸습니다. 관객 한 분 한 분이 던지는 질문들이 저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고, 질문을 하지 않는 분들도 무척 진지하게 들어주셨습니다. 만약 누군가 지루해하는 모습이 보였다면 저도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집중해 주시니 저 역시 진심으로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야케 쇼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 자체가 하나의 서사적 요소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영화에서 매우 큰 테마는 날씨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람이 중요했죠. 작은 바람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저는 실제 자연의 바람이 화면 안으로 들어와 주길 바랐어요. 그래서 촬영 전부터 자연스럽게 바람을 담기 위한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영화는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눈집의 벤조'와 '해변의 서경' 두 작품을 기반으로 한다. 여름과 겨울을 배경으로 한 각각의 이야기를 감독은 '극 중 극' 형태로 엮어 하나의 서사로 재구성했다. 원작 특유의 감정 결과 리듬을 어떻게 영화 언어로 옮길지가 이번 작업의 핵심 과제였다.
"원작 속에는 인간의 이상함, 유머, 슬픔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저는 그 감정들이 그대로 살아 있기를 바랐습니다.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는 정말 독자적입니다. 한 칸 한 칸, 그 사이의 여백,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까지 놀라움이 계속 이어지는 작품이죠. 그 감각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지가 가장 큰 과제였고, 그 점을 가장 고민했습니다."
두 작품을 엮어낸 과정에서 감독은 원작의 시대적 배경보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만남의 감정 구조에 더욱 집중했다. 특히 주인공을 중년 일본 남성에서 젊은 한국인 여성으로 바꾼 설정은 이야기의 결을 새롭게 비틀면서도, 낯선 환경에서 타인과 접촉할 때 생겨나는 미묘한 감정의 진폭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원작이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본질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나 어떤 이야기가 발생하는지, 그건 과거와 현재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인이 아닌 심은경 배우가 이 역할을 연기했다는 점은 그 만남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어주는 요소였습니다."
ⓒ엣나인필름
주인공의 국적과 연령을 바꾸는 결정은 작품의 정서를 새롭게 열어준 선택이기도 했다. 특히 ‘이’라는 인물을 맡은 심은경의 존재는 영화의 중심을 단단하게 세우는 역할을 했다.
“심은경 배우는 정말 특별한 분이었습니다. 함께 작업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고, 앞으로도 또 작업하고 싶은 배우입니다."
여름 에피소드는 겉으로 보기엔 한적한 섬의 풍경과 느린 계절의 리듬을 따라 흘러가지만, 인물의 내면에는 작은 불안과 균열이 자리한다. 감독은 그 단서를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몇 가지 섬세한 장치를 마련했다.
"극 중 카와이 유미 배우가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는 설정이 있습니다. 여름 섬에 와 있으면서 수영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야 했고, 동시에 이 인물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라는 감각을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어딘가 조금 불편하고, 마음이 온전히 편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치였죠."
여름 에피소드는 이가 쓴 영화라는 설정으로 극 중에 삽입되고, 강의실 씬에서 교수는 그 영화를 본 뒤 첫 인상을 '관능적'이라고 표현한다.
"작중 교수의 "관능적이다"라는 표현은 자연의 위대함과 생명력에 대한 감각에 가깝습니다. 비 오는 날 배우들이 물에 들어가는 장면을 찍을 때 저도 실제로 바다에 들어가 봤는데,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감각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실감을 안겨주더군요. 교수의 관능 발언도 저는 그런 감각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겨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관 주인은 사투리가 강하고 말투도 어눌하게 들리는 인물로 그려진다. 익숙하지 않은 억양이 주는 거리감은 여행지에서 마주하는 낯섦의 감정과도 맞닿아 있다.
"겨울 편에서 남자 캐릭터가 사용하는 사투리는 실제로도 낯설고 생소한 말투입니다. 일본인이라고 해도 100% 이해하긴 어렵고, 약 60%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행지의 언어가 그 지역의 역사와 시간을 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달라도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있다는 점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인물 간의 거리감이 말의 흐름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관계의 온도에 따라 호흡과 리듬이 달라지며, 장면의 분위기 역시 그 변화를 따라 움직인다.
"대사 속도 역시 의도적으로 조절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누구나 말을 천천히 하며 여백을 두게 되고, 조금 가까워지면 자연스럽게 말의 속도도 빨라질 수밖에 없죠."
영화의 마지막, 이가 시골 여관을 나와 눈밭을 걷는 장면에서 보이는 뒷모습은 어느새 가벼워진 호흡을 담고 있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향하는 사람의 밝은 기운이 스며 있다. 이 영화를 완성한 뒤 감독의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졌을까.
"마지막 장면을 찍으면서 저 역시 발걸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혼자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때는 내면이 가라앉는 순간이 많았지만, 영화 제작이 시작되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함께 들어오면서 마음이 자유로워졌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제가 가장 아끼는 신 중 하나입니다."
‘여행과 나날’을 완성한 뒤 미야케 쇼 감독에게 따뜻한 문장이 하나 도착했다. 작품을 본 지인이 건넨 짧은 말로, 그의 마음을 오래도록 비추는 문장이 됐다.
"제 영화를 보고 홍콩의 친구가 '이방인이 된다는 건 실패가 아니다. 타인과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라는 문장을 보내줬어요. 이방인을 스트레인저(stranger)라고 해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다르게 사는 인생이 실패가 아니야라고 받아들여줬지요. 제겐 보물처럼 남아있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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