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년에 두 번 인왕산에 오릅니다. 한 번은 새해 첫날, 또 한 번은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요. 인왕산은 서울 도심과 가장 가까운 산 중 하나인데, 해발고도는 낮지만 전망은 언제 봐도 놀랍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펼쳐지고, 진입로가 다양해 오르는 길마다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산 후 서촌이나 자하문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겸재 정선을 좋아하는 저는 인왕산을 오르다 ‘겸재 정선의 길’ 안내판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의 화폭 속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질 때면,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잠시 사라지는 듯합니다. 특히 수성동 계곡을 좋아합니다. 도심 속에서 만나는 작은 청량함이자, 시간의 결을 따라 걷는 감각을 선사하는 공간입니다. 저에게 인왕산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놀며 오르는 산’입니다. 새해의 다짐을 정리하거나 단풍을 핑계로 마음을 환기시키는 시간. 그런데 요즘은 그 길 위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을 정말 자주 만납니다. “이 좋은 걸 외국인들이 드디어 알아버렸구나.”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사실 한국의 산은 이미 훌륭한 관광 자원입니다. 서울만 해도 지하철 몇 정거장만 이동하면 북한산, 관악산, 인왕산 등 여러 산의 등산로가 이어집니다. 정상에서는 도시와 자연이 맞물린 장대한 경관이 펼쳐집니다. 이런 ‘도심 속 자연의 결합’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경험입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서울 등산관광센터’의 외국인 이용 비율은 절반을 넘고, 단풍철에는 70%에 이릅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성과 깔끔하고 세련된 인프라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한국의 등산 문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한 경치 때문만이 아닙니다. 등산로 곳곳의 사찰과 암자, 불상, 그리고 산 아래 이어지는 맛집과 막걸리집이 모두 문화로 이어집니다. 외국인들은 산을 오르며 한국의 미학을 체험하고, 하산 후 파전과 막걸리를 즐기며 ‘로컬의 리듬’을 느낍니다. SNS에서는 “한국의 등산은 완벽한 하루의 시나리오”라는 후기가 넘쳐납니다.
이 흐름의 긍정적 변화는 분명합니다. 서울을 넘어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으로 외국인의 발길이 확산되며, 숙박과 교통, 로컬 상권이 활기를 얻고 있습니다. 도시형 관광에 집중되던 시선이 지역으로 분산되면서, 산은 새로운 경제와 문화의 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K-푸드나 K-뷰티처럼 ‘K-하이킹’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한국 문화의 확장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물론 아쉬움도 있습니다. 서울 등산관광센터의 대부분의 서비스가 외국인에 한정되어 있고, 내국인은 외국인을 동반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또 일부 외국인 등산객이 환경 예절을 지키지 못해 불편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지적들은 오래도록 산을 생활의 일부로 품어온 시민들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래서 그 불만은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우리의 산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멀리 두면, 이는 문화의 경계가 넓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길, 그 어색함조차 공존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등산은 본래 ‘함께 걷는 문화’이고 우리는 지금 세계와 길을 나누는 중입니다.
앞으로의 방향은 더 섬세하고 따뜻하게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외국인이 장비를 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 브랜드의 품질은 이미 세계적 수준이고, 양말·장갑·모자·손수건 같은 소품은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는 훌륭한 기념품이 될 것입니다.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와 협업해 굿즈를 만들거나, 국립중앙박물관처럼 국립공원에서 굿즈 공모전을 여는 방안도 좋겠습니다. 또 내국인에게도 일정 보증금을 조건으로 장비 대여를 열어주면 형평성과 참여가 함께 살아나겠지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다국어 ‘K-Mountain Etiquette’ 캠페인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 QR코드로 등산 예절과 환경 보호 메시지를 안내하고, SNS에서는 ‘Leave No Trace in Seoul’ 같은 친환경 캠페인을 펼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시민 참여형 운영 구조를 도입해 지역 산악회나 시니어 커뮤니티가 안내와 관리를 맡는다면 ‘서울시민이 외국인에게 서울의 산을 소개하는 구조’가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산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길을 내줍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관광객은 로컬을 만나고, 우리는 그 옆에서 다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K-컬처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일상입니다.
북한산의 첫 단풍이 오늘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잠시 일상을 내려놓고 산에 올라보는 건 어떨까요?
김희선 Team8 Partners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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