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임금이 되고 싶다 - 환선길의 난 [정명섭의 실패한 쿠테타⑮]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7.15 14:29  수정 2025.07.15 14:30

서기 918년 6월 15일, 태봉국의 시중인 왕건은 측근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태봉국의 국왕 궁예가 관심법으로 아내와 아들은 물론, 장인과 대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자 들고 일어난 것이다. 궁예는 반란이 일어나자 도망치다가 농민에게 들켜서 죽음을 당했다. 왕건의 군대는 철원에 있는 태봉국의 궁궐을 장악하면서 반란군에서 혁명군이 되는데 성공했다. 궁예를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왕건은 조서를 내려 자신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을 설명하고, 앞으로 어떻게 통치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억울하게 잡혀온 청주의 군인들을 모두 풀어주라고 하는 등, 통치를 이어간다. 하지만 왕건의 이런 행보는 불과 4일 만에 끝날 수 도 있었다. 마군장군 환선길 때문이다.


말을 탄 기병이 보병을 공격하는 장면 ⓒ직접 촬영

마군장군 환선길이 역모를 꾀하였으므로 처형하였다.

고려사 세가 태조 왕건 1년 6월 19일자 기록이다. 환선길은 동생인 환향식과 함께 왕건을 추대한 공신이었다. 마군장군이라는 직책을 보면 기병대를 지휘하던 장수로 보이는데 고대에는 말을 다루는 기병대는 지금의 전차부대처럼 빠른 기동력을 이용한 적진을 돌파하거나 공수부대처럼 후방을 휘젓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정예한 병력으로 인정받았는데 고려 초기 마군은 기병대에 중앙군을 지칭했기 때문에 그런 마군을 지휘하는 장수라면 실력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거기다 왕건을 추대하는 역할을 맡았고, 반란이 성공한 이후에는 궁궐을 숙위, 그러니까 호위하는 역할도 맡았다. 왕건을 찾아와 궁예를 쫓아내자고 주장한 네 명의 장수 정도는 아닐지 몰라도 실력이나 충성도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임무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환선길은 출세길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불과 4일 만에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일까? 본기에 해당되는 세가에는 한줄로 간단하게 나오지만 열전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아내는 환선길에게 이런 말로 부추겼다.


“당신은 재주와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들이 복종할 뿐 아니라 큰 공도 세웠지만, 권력은 다른 사람이 잡았으니 어찌 분하지 않습니까?”


환선길이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아무리 부인이 부추겼다고 해도 당사자가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결코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환선길로 빙의해서 그의 심정을 최대한 분석해보자면 엉겹결에 반란에 가담하긴 했지만 나랑 비슷한 등급이었던 왕건이 옥좌에 올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불편했을 수 도 있다. 그리고 만만해보이는 왕건이 임금이 되었는데 내가 그 자리에 못 오를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다 자신은 동생과 함께 왕건을 가까이서 호위하고 있었다. 거사를 일으키기도 충분했고, 그럴 능력도 있었다고 믿었다. 이런 환선길의 불온한 움직임을 확인한 마군 장군 복지겸이 왕건에게 환선길이 역심을 품고 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왕건은 증거가 없다면서 그냥 놔둔다. 사실, 옥좌에 오른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공신 중 한 명을 역모 혐의로 체포하는 건 몹시 부담되는 일인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런 주저함이 하마터면 왕건을 죽을 뻔하게 만들었다. 6월 19일, 궁궐의 정전 혹은 편전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던 왕건은 동쪽에 딸린 날개채인 곁채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랐을 것이다. 그곳에 있던 환선길이 5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쳐들어와서 곧장 왕건을 죽이려고 했다. 이럴 때 나타나서 막아야 하는 호위병이 바로 환선길과 그의 부하들이었으니까 아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왕건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서 호통을 친다.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이미 정하여졌거늘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


환선길이 왕건의 이런 논리에 납득된 것인지 혹은 이렇게 큰 소리 치는 걸 보면 몰래 카메라, 아니 함정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환선길은 그 순간에 왕건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달아난다. 그리고 격구장까지 달아났다가 추격한 왕건의 부하들에게 붙잡혀셔 죽고 만다. 동생인 환향식 역시 뒤늦게 도착했다가 형의 죽음을 알고 도망쳤다가 죽음을 당하고 만다. 고려 왕조를 4일 만에 끝낼 뻔한 환선길의 반란은 이렇게 어이없이 막을 내리고 만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나고 너무 쉽게 진압당해서 온갖 음모론들이 등장한다. 왕건과 그의 일파들이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 같은 환선길을 미리 제거했다는 내용이 음모론의 주요 레퍼토리다. 하지만 환선길이 궁궐을 숙위했다는 것을 보면 함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거기다 복지겸이 한번 얘기했을 때 왕건이 아니라고 한 것을 보면, 정말 믿고 있었을 수 도 있다. 만약, 의심한 상태였다면 5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렇게 가까이에 두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한 왕건은 위기를 넘겼다며 한숨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왕건에 대한 반란은 이제 시작이었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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