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는 더 이상 기업의 ‘만능 도구’가 아니다. 태광산업의 자사주 기반 교환사채(EB) 발행 시도는 시장의 거센 불신에 부딪혀 결국 중단됐다. 정부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규제 회피성 의혹에 절차적 불투명성까지 겹치면서 신뢰를 잃은 탓이다. 기업이 자사주를 일방적으로 활용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발단은 태광산업이 지난달 말 자사주 전량(지분율 24.4%)을 담보로 3186억원 규모의 EB 발행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문제는 절묘한 시점이었다. 정부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와 상법 개정안을 준비하던 시기에 발행 상대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이 시장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자사주 소각을 피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해석된 것이다.
특히 태광산업은 자사주 비중이 높고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아 자사주 소각 기대감이 컸던 종목이다. 이러한 기대가 작용해 지난달에는 주가가 3년여 만에 100만원선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EB 발행 발표 이후 분위기는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뒤바뀌었다.
EB는 자사주를 담보로 투자자에게 일정 기간 내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채권이다. 채권자가 EB를 사서 교환권을 행사하면 자사주가 다시 유통돼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가 희석될 수 있다. 시장에서 제3자 배정 유상증자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논란이 커지자 태광산업은 화장품·에너지·부동산 개발 등 신사업에 향후 2년간 1조5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서둘러 발표했다. 애경산업 인수 등을 염두에 둔 행보였지만 급조된 인상이 끝내 지워지긴 어려웠다. 회사 측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으나 이미 돌아선 시장의 신뢰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2대 주주 트러스톤자산운용은 “명백한 상법 위반이며 배임행위”라며 서울중앙지법에 EB 발행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금융감독원도 공시정보 누락을 이유로 즉각 정정 명령을 내렸다. 소액주주연대 역시 EB 발행 찬성 이사들을 배임 혐의로 고발하며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그런데도 태광산업은 같은 날 긴급하게 이사회를 열어 발행 대상을 한국투자증권으로 확정하는 등 강행 의지를 내비쳤다. 절박한 자금 조달이란 명분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이기식 태도가 시장의 반발을 키웠다. 결국 태광산업은 뒤늦게 발행 절차를 잠정 중단하고 이해관계자들과의 소통을 약속하며 수습에 나섰다.
이번 논란은 자사주 규제 강화 움직임에도 불을 지폈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해온 상법 개정안은 지난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당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자사주 소각 제도화를 위한 추가 입법도 예고한 상황이다. 기업 입장에선 자사주가 경영권 방어의 방패로 작동하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진 셈이다.
물론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 자체는 법이 허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관건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자사주는 기업의 자산인 동시에 주주의 권익과 직결된 민감한 영역이다. 신중하게 다뤄야 할 ‘양날의 검’인 만큼 정당한 목적과 투명한 절차, 성의 있는 설명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태광산업 사례는 이 같은 원칙이 무너졌을 때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이번 사태는 재계 전반에 뼈아픈 경종을 울렸다. 앞으로 기업이 자사주를 활용하려면 더욱 날카로워진 시장의 눈높이를 넘어서야 한다. 기업들이 먼저 책임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할 때다. 이제 주주들은 기업의 자사주 남용에 침묵하지 않는다. 명분 없는 자사주의 활용은 냉엄한 역풍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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