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인물 중에서 장보고만큼 입신양명한 인물은 없을 것이다. 비견되는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면 김유신 정도가 떠오른다. 하지만 비록 멸망했지만 가야왕의 후손이며 진골 귀족인 김유신과, 6두품조차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장보고의 신분은 하늘과 땅을 넘어서서 태양과 해왕성 정도의 거리일 것이다. 신라는 골품제라는 강력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다. 신분에 따라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한계가 명백하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야심차고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족쇄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신라인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바로 당나라였다. 정확하게는 당나라에 가서 군인이 되어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서기 645년,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구원하러 온 고구려군과 주필산에서 전투를 벌이던 당시, 병사 중에는 신라 출신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바로 설계두라는 인물로 6두품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20년 넘게 기회는 오지 않았고,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던 그에게 천금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바로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갈고닦은 무술 실력을 뽐내며 좌무의과의라는 벼슬을 받는다. 그리고 주필산 전투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만다. 소식을 들은 당나라 황제 이세민은 어의를 벗어주면서 대장군의 관직을 추증한다.
설계두는 죽은 다음에야 출세한 셈이지만 장보고는 살아서 영광을 누렸다. 완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그는 어린 시절 친구인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군에 입대한다. 당시 당나라는 번장이라고 불리는 이민족 출신 장수들을 중용했고, 군인으로도 받아들였다. 장보고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무령군의 소장으로 진급한다. 여기까지였다면 신라 출신의 당나라 장수로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다시 신라로 불러들였다. 군대를 그만둔 그는 서기 828년, 신라로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당나라의 해적들에게 우리 백성들이 잡혀가서 노예로 팔려 가는 일이 많으니, 자신이 막고 싶다고 말한다. 순수하게 동족인 신라인들을 구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다. 대사는 신라의 17관등 중에 12번째 관등이다. 하지만 한자가 틀리기 때문에 별도의 특별관직으로 보인다. 왕명을 받은 그는 청해진에 무역기지 겸 군사기지를 세우는데 완도의 부속섬인 장도로 추정된다. 장보고는 그곳에서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에 종사하면서 당나라 해적들을 소탕하면서 명성을 떨친다.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로 가기 위해 장보고의 보호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는 것에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장보고가 이렇게 잘 나가는 사이, 신라는 차츰 망해가고 있었다. 특히, 그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흥덕왕이 승하하고 다음 왕위룰 놓고 내분이 발생한다. 유력한 왕위 후보들은 김제륭과 김균정이었는데 친척관계인 둘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에게 칼을 드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적판궁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김제륭이었다. 승리하는 그는 신라의 마흔 네 번째 임금인 희강왕으로 자리매김한다. 반면, 패배한 김균정은 살해당했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복수를 맹세하면서 청해진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장보고는 주판알을 튕기며 계산하는 동안, 금성에서는 반란이 일어난다. 김제륭을 왕위에 앉히는데 큰 공을 세우고 상대등에 임명된 김명이 돌연 야심을 드러내며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배신을 당한 민애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왕위는 김명이 차지한다. 하지만 김명의 반란은 오히려, 청해진에서 와신상담하고 있던 김우징에게 왕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제공하고 만다. 드디어 장보고가 움직이면서 신라는 격랑에 휩쓸린다.
서기 838년 2월, 청해진의 군대와 합세한 김우징은 금성으로 진격한다. 약 1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지금의 대구인 달벌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청해진 군대가 승리한다. 패배한 김명은 별장인 월유택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혀서 목숨을 잃는다. 그가 민애왕이라는 이름으로 즉위한지 불과 1년만인 서기 839년 정월의 일이다.
드디어 김우징은 복수에 성공하고 신무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기쁨을 다 누리지 못하고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왕위는 지체하지 않고 그의 아들에게 이어지면서 문성왕이 즉위 한다. 김우징의 죽음은 뜻하지 않는 나비효과를 불러왔는데 바로 장보고와의 약속 때문이다.
김우징은 자신이 왕위를 되찾는데, 도움을 주면 자신의 아들과 장보고의 딸을 혼인시키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죽고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문제가 생긴다. 진골 출신의 대신들이 극력 반대하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에 반발한 장보고는 크게 화를 냈다. 이 시점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미묘하게 다르다. 삼국사기는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오고 삼국유사는 ‘모의했다’로 적혀있다. 어쨌든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딴마음을 먹을지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반란이나 다름이 없었다. 겁에 질린 문성왕 앞에 무주 사람 염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장보고의 목을 베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청해진으로 찾아간 그는 장보고의 비위를 맞추며 술을 마시다가 별안간 칼을 뽑아서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서기 846년 봄,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지 18년 만의 일이다. 그의 죽음으로 반란은 막을 내렸고, 청해진은 몇 년 후에 사라진다. 청해진의 주민들은 벽골군으로 옮겨진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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