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 황승재 감독 "한국판 블랙미러?, 우리 사회 투영했죠"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5.06.03 10:33  수정 2025.06.03 10:33

영화 '귀신들'은 SF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낯선 미래가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의 민낯이다. 2021년 제8회 SF 어워드 영상 부문 대상을 받은 '구직자'들의 세계관을 이은 이 작품은 AI와 함께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를 설정해놓고, 보이스피싱과 주택 대출, AI와의 인간의 관계, 노동 등의 문제를 '보이스피싱' '모기지' '음성인식' '페어링' '업데이트'까지 총 5개 에피소드로 펼쳐냈다.


'보이스피싱'은 아들의 모습을 한 AI가 치매의 노인에게 보이스피싱을 시도하고, '모기지'는 집을 사기 위해 대출을 받으면, 그 빚을 나의 AI가 앞으로 500년 동안 갚아야 하는 세계를 그린다. '음성인식'은 애완용 AI 처리를 놓고 일어나는 갈등, '페어링'은 오랜만에 만난 여자와 재회한 남자가 뒤늦게 진심을 전하지만, 여자와 남자 모두가 서로 다르게 존재한다는 반전을 담고 있다. 마지막 '업데이트'에서는 죽음을 앞둔 인물이 자신을 대신할 AI에게 삶의 데이터를 넘겨주는 과정을 통해, 기억과 존재의 경계를 탐색한다.


이처럼 황 감독은 가까운 미래 속에 현실의 그림자를 깊게 깔아놨다.


"서사는 어떻게 보면 '블랙미러'나 외국의 AI 드라마들과 비슷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한국적인 건 뭐가 있을까'를 제일 먼저 고민했죠. 그래서 한국 뉴스에 나올 만한 이야기를 찾았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도 많이 참고했고요. 보이스피싱도 그렇고, 모기지도 그렇고, 노인 문제, 주택 문제, 아동학대, 동물학대 등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문제들을 설정으로 가져왔습니다."


작품 속 배경은 미래지만, 감독은 그 미래를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았다. 각 에피소드는 모두 현실에서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이슈로, 감독은 그 문제들을 AI와 연결 지으며 은유적으로 풀어냈다.


"영화 속 미래를 화려하게 꾸며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오히려 시의성이 너무 강해서 '이게 정말 AI 이야기 맞나?' 싶을 정도로 현재처럼 느껴지게 만들도록 했죠."


기술이 정서와 연결되는 방식은 영화 속 핵심이다. AI가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추상적이지만, 감독에게는 꽤 현실적인 고민이었다.


"AI는 감정을 흉내만 내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감정이라는 건 결국 인간이 인정하는 순간 생기는 거예요. 내가 그 감정에 동의하면, 그건 감정이 있는 거죠. 지금도 인간들은 물건이나 동물에게 감정이입을 하잖아요. 노트북에 스티커 붙이고, 수집하는 안경에 이름 붙이고, 그런 게 다 감정이입이죠."


배우 캐스팅 역시 이번 작업의 중요한 축이었다. 이요원, 강찬희, 정경호, 백수장 등 각기 다른 결을 가진 배우들과 함께하며 이야기의 톤도 달라졌다. 저예산임에도 불구, 대중 독립영화에서 활약하고 있는 배우의 라인업을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독과 배우들의 신뢰가 작용했다.


"(강)찬희는 전작 '썰'에서 함께했어요. 제가 따로 디렉션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스스로 잘 준비해와요. 특히 제 세계관을 좋아하고, 공감도 잘해서 현장에서 이해 안 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이건 이렇게 해볼까요?' 제안하는 능동적인 배우라 작업이 편했죠. 정경호 선배님은 연기에 대한 갈망이 항상 있는 분이에요.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고, 제가 하자고 하면 기꺼이 해주시죠. 1인 2역도 정말 즐기셨어요. 백수장 씨는 멜로 이미지가 없었는데, 본인이 새로운 역할을 원하셨어요. 그래서 잘 맞았죠."


황 감독은 특히 강찬희의 겉모습과 그 속에 감춰진 분위기 사이의 간극, 도전 정신을 배우로서의 매력을 꼽으며 앞으로의 가능성을 강조했다.


“찬희는 선한 이미지인데, 그 안에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2%의 비밀스러움이 연기에서 힘을 발휘해요. 말하자면 보호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제가 만난 찬희는 그렇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찬희를 보면 착하고 순한 이미지로만 인식하는데 그런 사람이 사실은 범죄에 연루되어 있거나 어두운 면이 있다는 설정은,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죠. 그래서 반전이 잘 먹히는 배우예요. 그냥 딱 보이는 이미지가 전부인 배우들이 있는데, 그런면에서 찬희는 정말 입체적인 결을 갖고 있어요. 도전 정신도 있고요. 찬희가 제 영화에 출연한 것 자체도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대부분 배우들은 주저해요. 아니면 안전한 선택만 하죠. 찬희는 그런 타입은 아니더라고요."


이요원과는 오랜 인연으로 다시 함께하게 됐다.


"99년도부터 알고 지낸 사이에요. 연극영화과 수업에서 처음 봤죠. 이요원 씨는 플랫폼의 변화에 적응하고 싶다고 했어요. 이요원 씨가 출연한 에피소드가 동물학대처럼 시작해서 아동학대로 전환되는 구조인데요, 그 균형 잡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이야기 자체도 모호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요원 씨가 연기를 잘해줘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어요. 진짜 연기 잘하는 배우는 감독의 짐을 확 덜어줘요. 이요원 씨는 그런 빛 같은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예능도 나가서 영화 홍보까지 해주셨고요. VOD 조회수도 생각보다 잘 나온 것도 이요원 씨의 그런 활약 덕분이라고 생각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이스피싱'에 출연해 아들을 잃고, 치매에 걸린 노인 역을 맡은 故 이주실 배우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성향의 소유자였다고 회고했다.


"고정적인 이미지로만 캐스팅되는 걸 답답해하셨고, 이 역할이 단순한 모성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알고 흔쾌히 하셨어요. 아들을 닮은 AI가 돈을 털러 오는 걸 즐기고 있는 인물인데, 그 이야기를 나눴을 때 바로 이해해 주셨어요.”


황승재 감독은 최근 극장 배급 환경에 대한 체감적 위기를 언급하며, 그것이 단순히 한 작품의 성과 문제가 아니라 한국 영화계 전반의 생태계 붕괴와 맞닿아 있는 문제라고 짚었다. 특히 독립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창구가 점점 줄어들고, 그 빈자리를 외화 재개봉작이나 특정 목적성 콘텐츠가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2년 전 '안나푸르나' 개봉할 땐 독립, 예술극장에도 손님이 꽤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 숫자마저도 줄어든 걸 체감했어요. '지금 우리가 새로운 관객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고 있나'라는 고민이 많이 들더라고요. 자책감도 들고요. 지금 독립영화관에 가보면 거의 다 외화 재개봉작이에요. 예전엔 새로운 한국 영화들이 개봉해서, 극장 가면 '이런 영화도 있었네' 하면서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회가 많이 줄었어요. 그렇기에 영화가 극장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유통기한을 좀 더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황 감독은 감독은 관객들이 '귀신들'을 통해 기술이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 일상에 파고든 현실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길 바랐다.


"미래가 돼도 우리는 그걸 미래처럼 인식하지 못해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스마트폰도, 90년대의 저 같은 대학생이 봤으면 엄청난 첨단 기술로 느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일상이죠. AI도 이미 일상생활 속으로 성큼 들어와 있는데, 우리가 그걸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뿐이에요. 한 번쯤은 그 흐름을 돌아봐야 할 타이밍이 온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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