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74년, 신라가 당나라와 한창 전쟁 중인 와중에 오늘날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읍에 있던 금마저의 옛 백제 사람들은 낯선 무리들과 만난다. 생김새와 말투는 비슷했지만 옷차림은 달랐다. 어리둥절해하던 그들은 곧 새로운 무리가 자신처럼 신라에게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백제가 의자왕이 항복한 이후에도 왜의 지원을 받아서 한동안 저항한 것처럼 고구려 역시 평양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했다.
익산 왕궁리 5층석탑 (출처 : 직접 촬영)
백제부흥군과의 차이점은 상대가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라의 지원을 받았다. 함께 압록강을 건너서 오골성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결국, 당나라군의 공세에 밀려 신라의 영토로 넘어오고 만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국왕으로 추대된 안승은 계속 고구려 땅에 남아서 저항하는 것을 주장하던 검모잠을 죽이고 만다. 그 사실을 알았다면 금마저의 백제인들은 꽤 씁쓸해했을 것이다. 백제 부흥군 역시 부여풍 왕자가 복신 장군을 죽이면서 기세가 꺾였기 때문이다.
신라가 당나라군을 피해 남하한 고구려의 유민들을 다른 곳도 아닌 옛 백제 땅으로 보낸 이유는 명백했다. 백제인들에 대한 견제, 그리고 고구려인들 역시 낯선 땅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금마저의 고구려인들에게는 백제와는 달리 보덕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신라에게 충성을 다한 안승은 보덕국왕으로 책봉되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몇 년이 지나갔다. 서기 680년, 문무왕은 누이동생의 딸을 보덕국왕 안승과 혼인시킨다. 아마, 당사자인 안승은 신라의 왕족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것이고 보덕국의 주민으로 살아가던 고구려의 유민들 여깃 나쁜 징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무왕이 승하하고 신문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무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신문왕의 다음 목표는 보덕국의 흡수였다. 서기 683년 10월, 신문왕은 안승을 신라의 수도인 금성으로 불러들여서 김씨 성을 하사하고 소판의 관등을 준다. 잡찬이라고 불리는 소판은 진골 만이 오를 수 있었다. 아울러, 좋은 집과 밭을 하사했다고 했으니 안승은 기쁜 마음으로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은 보덕국의 주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국왕의 부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년 후인 684년 11월, 안승의 조카인 장군 대문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마, 보덕국을 없애고 주민들을 분산 배치하려는 움직임에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문의 반란은 시도로 그치고 만다. 아마도 미리 대비하고 있었을 신라의 발 빠른 대처로 처형당하고 만다. 하지만 반란은 이제 시작이었다. 대문의 죽음을 계기로 보덕국 주민들은 감시하던 신라의 관리들을 죽이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낯선 금마저에 오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고구려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아마 1943년 바르샤바 게토에서 봉기한 유태인들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을 것을 알게 되면서 저항한 것처럼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보덕국의 주민들은 전투민족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고구려의 후예로서 마지막 불꽃을 장렬하게 태운다.
보덕국의 반란 소식을 접한 신라는 귀당 제감 핍실을 지휘관으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한다. 귀당은 지금의 경북 상주에 있던 상주정에 주둔하는 지방군으로 제감은 신라의 17관등 중 10번째 관등에 해당되는데 귀당에는 다섯 명의 제감이 있었다. 아마 귀당의 일부 부대를 진압군으로 보낸 것 같은데 핍실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기세를 올린 보덕국의 주민들은 가잠성 근처까지 진출해서 진압군을 막을 준비를 한다. 신라가 꺼낸 다음 카드는 고구려의 유민들로 구성된 황금서당이었다. 바로 전해인 683년에 편성된 것으로 봐서는 아마 보덕국의 반란에 대비해서 창설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다른 군단과 함께 출동했을 황금서당에는 황산벌에서 전사한 화랑 반굴의 아들 김영윤이 있었다.
그는 지연전을 펼치자는 다른 장수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부하들과 함께 진격해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결국 보덕국 주민들의 반란은 진압당하고 만다. 애초부터 이길 가능성은 없었지만 아마 고구려인으로서 죽기를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항복한 보덕국의 주민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흩어지게 된다. 몇 년 후에 보덕국의 유민들로 구성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창설한 것을 보면 생각보다 인명피해가 많은 것 같지는 않다는 추측이 자그마한 위안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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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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