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소년´ 사각의 링에 오르다

입력 2008.06.20 08:3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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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원이라는 복서가 있다.

복싱의 인기가 아직 남아있던 90년대 중반 당시 18전 전승으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페더급 1위에 오르며 꽤 유명세를 탔던 복서다. 그러나 최재원은 세계챔피언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최재원은 94년 7월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챔피언 월프레도 바스케스에게 2회 KO패를 당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세계 타이틀 도전을 마감했다. 이후 4게임을 더 치르고 최재원은 링에서 내려왔고 그렇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은퇴한 지 10여 년이 흐른 2005년 7월, ´왕년의 복서´ 최재원이 다시 글러브를 끼고 복귀한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재기전 상대는 27살의 일본 복서 도리가에 슈사쿠.

궁금해졌다. 최재원은 왜 다시 링으로 올라온 것일까. 못다 이룬 세계챔피언의 꿈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불혹을 앞둔 그의 나이가 걸렸다. 그렇다고 돈 때문에 다시 글러브를 낀 것도 아닐 것이다. 세계챔피언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게 작금의 한국 복싱 현실이 아니던가.

뜻밖에도 최재원이 다시 링으로 올라온 이유에는 야구가 숨어 있었다.

´야구소년´ 최용환의 초등학교 시절 모습


최재원에게는 야구 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하나있다. 권투를 그만둔 뒤 잇따른 사업 실패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만만찮은 돈이 들어가는 야구를 포기하라고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주전 1번 타자로 활약하는 등 야구 재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아들 용환이는 야구에 집중할 때만 가출한 엄마를 찾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이 중학교로 올라가자 불어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정적인 수입을 얻고자 환경미화원이 됐지만, 결국 훈련비를 내지 못해 아들은 야구를 그만둬야 했다. 가난 때문에 꿈이었던 야구를 포기해야 했던 날, 서러운 눈물을 흘린 건 아들 용환이가 아니라 아버지 최재원이었다.

최재원은 글러브를 다시 끼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좌절하지 말고 힘을 내라는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다시 링으로 올라왔다.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아들의 야구 훈련비를 지원해줄 후원자도 생기지 않을까´하는 바람도 그를 움직였다.

최재원은 술과 담배를 끊고 복서의 몸을 만들고자 하루 8시간씩 훈련을 해 20kg을 감량했다. 그렇게 ´왕년의 복서´ 최재원은 다시 사각의 링으로 돌아왔다.

2005년 7월 10일 최재원의 재기전. 시종일관 일본 선수를 거세게 몰아붙인 최재원은 6라운드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아버지의 힘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었다.

함께 링에 오른 최용환(왼쪽)과 최재원


2008년. 아들 최용환은 훌쩍 자라 고등학생이 됐다. "부모님 다음으로 좋아하던 게 야구"라고 이야기하던 ´야구소년´은 이제 방망이를 잡는 대신 복싱 글러브를 낀다.

자신의 꿈을 위해 링에 오르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프로야구 선수 대신 복싱 챔피언의 길을 선택했다. 워낙 운동 신경이 뛰어난 덕분인지 복싱에도 대단한 재능을 보이고 있다.

´왕년의 복서´는 야구 선수를 꿈꾸는 아들을 위해 다시 링으로 돌아왔고, ´야구 소년´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고자 그라운드 대신 사각의 링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렇게 두 부자는 아픈 과거를 함께 이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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