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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미의 영화로 보는 세상] 국가폭력의 시대에 살았던 작가 리히터의 삶


입력 2021.06.17 15:40 수정 2021.06.17 16:28        데스크 null (desk@dailian.co.kr)

영화 ‘ 작가미상’

게르하르트 리히터ⓒ 게르하르트 리히터ⓒ

2011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가수 에릭 클립튼이 소장한 ‘추상화 809-4’는 380억원으로 당시 최고가로 팔렸다. 다음 해 추상적 풍경화 ‘대성당 광장, 밀라노’가 414억원에 낙찰됐으며 이는 당시 전 세계 생존하는 작가의 작품 중 최고가였다. 2015년 경매에 나온 ‘추상화 599’는 518억원에 거래돼 자신의 최고가 기록을 다시 한번 갈아치웠다. 이들 추상화의 작가는 바로 리히터다. 독일 추상 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이자 살아 있는 신화로 불린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리히터의 대형 색채 추상화를 자택에 걸어놓을 정도로 좋아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리히터의 작품들이 최근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작가미상’이 개봉되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영화 ‘작가미상’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역사와 정치, 사랑과 예술을 한 편의 작품 속에 담아낸 수작이다.


1937년 독일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미술학도 쿠르트(톰 쉴링 분)는 우생학 정책의 피해자였던 이모(사스키아 로젠달 분)와 같은 이름의 여인 엘리자벳(폴라 비어 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무르익을수록 세상에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게 되고 그의 상처는 작품으로 투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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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예술의 지나친 사회적 역할을 경계한다.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현대미술이 태동하면서 파격적이고 획기적이며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칸딘스키, 몬드리안, 피카소, 뭉크 등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했다. 하지만 전쟁을 경험하면서 예술은 홍보의 수단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1937년 독일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 파시즘과 제국주의로 물들어 있었던 때다. 예술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해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 되었고 국가사회주의를 찬양하지 않는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치부되었다. 영화는 예술이 지나치게 사회적 역할을 강조할 때 이념과 정치에 이용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보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우선되는 위험성을 말한다. 쿠르트의 이모 엘리자벳은 히틀러에게 꽃다발을 전달해주면서 그 충격으로 조현병을 앓게 된다. 독일정부는 독일인종의 우생학 정책에 따라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불임시술과 함께 가스실로 보내어 생명을 앗아간다. 쿠르트가 사랑하는 엘리자벳의 아버지 칼은 이모의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로 독일의 잘못된 우생학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그는 쿠르트의 아이를 임신한 자신의 딸까지도 낙태를 집도한다. 영화는 국가가 지나치게 우선시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손상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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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자유의지와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동독에 살고 있었던 쿠르트는 예술가로서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고자 고민해왔다. 하지만 환경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의미 있고 생산적인 사회주의 벽화를 만들 것을 강요받는다. 자신의 가치관과 다르다고 느낀 쿠르트는 결국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에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와서 최고의 화가로 거듭난다. 영화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경기침체와 양극화가 심화 되고 코로나 사태로 정부의 역할이 커지면서 세계적으로 전체주의와 사회주의 경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영화 ‘작가미상’은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낼 수 없었고 지워야만 했던 안타까운 국가폭력의 시대에 살았던 작가 리히터의 삶을 통해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예술은 물론 우리네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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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미 / 한국영상콘텐츠산업연구소장,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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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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