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안 스포츠 매거진]
"김한수는 국가대표 구성할 때 가장 먼저 넣어야 되는 선수야. 김한수가 언제부터 수비형 선수였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럼 김한수는 방망이 대신 글러브를 들고 타석에 들어서나”
한국스포츠 역사에 ´3월의 광란´으로 영원히 기억될 ‘2006 WBC 4강 신화’를 이끈 김인식(59, 현 한화 이글스) 감독의 말이다(당시 김한수는 허벅지 부상을 이유로 태극마크를 반납했다).
김인식 감독을 비롯한 국내야구 지도자들에게 ´국가대표팀 3루수를 선발할 때 가장 먼저 어떤 선수의 이름을 올리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김한수를 명단 맨 윗줄에 적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에 대한 신뢰는 두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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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머리 사자의 쓸쓸한 말년
한때 무리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사자라도 늙고 병들어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순간 비참할 정도로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집단생활을 하는 사자에게 있어서 정상에서 내려온 뒤의 노후는 무리의 존경을 받는 안락 보다는 비참한 말년이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프로야구 8개 구단 중 역대승률 1위에 빛나는(1662승 75무 1274패 승률 0.566) 삼성 라이온즈에는 한국야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수놓은 스타들이 많았지만, 만인의 존경을 받으며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명예롭게 떠난 선수가 거의 없다.
팬들은 삼성출신 스타들을 말할 때, 이선희(52)-김일융(54)-김시진(49)-장효조(50)-박충식(37)-이만수(47) 등 한때 한국프로야구라는 정글을 지배했지만 버림받은(?) 이름들을 먼저 떠올린다.
삼성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저 양준혁(38)도 한때 광주로 ´유배´ 당했던 쓰라린 추억이 있고, ‘일본야구의 심장’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로 맹활약 하고 있는 이승엽(31)도 삼성과 ´아름다운 이별´을 했다고 말하는 이는 많지 않다.
삼성의 내야를 진두지휘했던 류중일(44,현 삼성라이온즈 수비 코치) 정도가 벤다이어그램 바깥부분. 삼성 라이온즈 출신의 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 현재 삼성 유니폼을 입고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2005 한국시리즈 우승‘ 배영수-오승환-양준혁 그리고...
선동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2005년,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누린다. 당당한 에이스로 자리 잡은 배영수의 호투와 권오준(27)-오승환(25)이라는 최강의 불펜라인을 앞세워 두산의 타자들을 넉아웃 시켰다. 또 삼성 방망이는 적재적소에 득점을 뽑아내며, 리오스(34)-랜들(30)-박명환(30)-이혜천(28) 등이 버틴 두산의 높은 마운드를 무력화시켰다.
대부분의 팬들은 양준혁 활약에 주목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 ‘숨은 공신’ 김한수도 있었다.
2004시즌을 끝으로 FA 자격을 얻게 됐던 김한수는 현대 유니콘스와의 ‘2004 한국시리즈’에서 타율 0.378(27타수 14안타) 1홈런 6타점의 불방망이를 휘두르며 타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2004년 우승컵은 현대 품으로 돌아갔고, 김한수의 맹활약은 팀의 시리즈 패배로 묻히고 말았다. 김한수의 가치가 재조명 될 기회는 그렇게 지나가 버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맞이한 2005~2006 한국시리즈에서는 부진했지만, 양준혁과 함께 선수단의 기둥이 되어 팀 2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비록 스포트라이트는 배영수, 박진만, 권오준, 오승환이 받았지만, 팀의 우승으로 김한수는 행복했다.
김한수는 FA 선언당시 시장 최대어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었다. 3할과 골든글러브란 어려운 미션을 ‘조용히’ 달성하는 그에게 3루 자리의 마땅한 주인이 없었던 롯데 자이언츠와 LG 트윈스 등은 정규시즌 중에도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냈다. 특별한 큰 부상과 이렇다 할 불평 없이 묵묵히 3루 자리를 지켜준 그에게 눈독을 들이는 팀이 많았다. 특히, 당시 롯데 감독이던 양상문(45, 현 LG투수코치)의 요청으로 김한수는 롯데 유니폼을 입을 뻔했다.
그러나 선동렬 감독의 긴급 요청 등 삼성은 김한수에게 4년 28억원을 제시한다. 그리고 김한수는 주저하지 않고 ´푸른 피의 사나이´로 영원히 남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팀 선배 류중일이 그랬던 것처럼 팬과 구단 모두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며 레전드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불행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FA로 삼성에 잔류한 2006년부터 그는 급격한 노쇠화를 보였다. 구단은 그가 10년 가까이 지켜오던 3루를 팀의 ´젊은 사자´ 조동찬(24)에 내주길 원했다. 순둥이답게 김한수는 순순히 바로 맞은편 베이스인 1루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에게 1루는 한국의 반대편인 우루과이에 놓인 것처럼 낯설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김한수는 본인이 원치 않은 고난을 겪게 됐다. 수비율 99.9퍼센트를 자랑하는 1루수지만, 그의 고민은 수비의 부족한 0.1퍼센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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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를 이제야 돌아보다
1994년 입단 당시 김한수는 김용국이 태평양으로 이적한 해라, 큰 어려움 없이 3루에 안착했다. 그러나 방위복무를 마치고 온 1997년이 문제였다. 복무 중이던 1995년 덩치 큰 선수가 3루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양준혁과 더불어 미래의 주포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동수(34)였다. 그리고 양준혁-이동수라는 상징을 점차 부각시키며 지속하던 공격적인 삼성 팀 컬러를 감안했을 때, 김한수가 바라보던 써드 베이스는 대수비로 나설 때만 밟을 수 있는 코스가 되는 듯했다.
팀 내에서 이동수는 분명 삼성의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에 충분히 부응해줄만한 선수였고 그럴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이동수는 1996년 부진을 겪으면서, 1997년 롯데로 트레이드 된다. 여려 보이던 김한수는 이동수가 맡은 3루 배역 대본을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동수가 포함됐던 향후 10년간 베스트 진용의 구도를 조금씩 수정해 나갔다.
숱하게 언급됐던 그의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찌 보면 김한수는 전국대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고교시절부터 카메라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 서울 광영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뛰고 또 뛰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중앙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을 다시 한 번 강하게 채찍질 했고, 그 결과 임수혁(38), 인현배(36), 서용빈(35), 김태균(36), 이숭용(36) 등과 함께 2차 지명 대상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당시 김한수가 삼성에 지명됐을 때, 그가 삼성의 레전드 급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상한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었다.
☞ 충분히 화려한 김한수, 프로의 정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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