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개통 9일 만에 전격 방중…혈맹 과시 넘어 경제협력 확대 포석
中, 북·러 밀착 속 대북 영향력 회복 시도…북한은 경제 활로 확보
트럼프와 북·미대화 재개 가능성 염두…중국의 외교적 중재 역할 주목
김정은(가운데 왼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24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방문해 중국 권력 서열 4위인 왕후닝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전국정협) 주석과 회담하고 있다. ⓒ 중국중앙TV(CCTV) 홈페이지 캡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4일 신압록강대교를 통해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방문한 뒤 당일 귀국했다. 김 위원장이 개통 9일 만에 이 다리를 건너 중국을 전격 방문하면서 두 나라의 전통적 혈맹관계를 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협력을 확대하는 한편 북·러 밀착과 북·미 대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다목적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이날 중국 랴오닝성 단둥을 방문해 중국 권력 서열 4위인 왕후닝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정협) 주석과 회동했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지난해 9월 베이징 방문 이후 1년 1개월 만이다. 두 사람은 항미원조기념관을 찾아 중국군 전몰장병을 추모한 뒤 자동차 공장을 함께 시찰하며 경제협력 확대 의지를 드러냈다.
그가 방문 장소로 단둥을 선택한 것은 정치·경제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북·중교역의 관문인 단둥은 경제협력의 현장이자 중국의 6·25전쟁 참전을 상징하는 도시다. 방문 시점도 중국의 참전 76주년 기념일인 25일을 하루 앞둔 날이다.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맞서 북한을 돕는다)라는 역사적 유대를 재확인하면서 경제협력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중국의 ‘전략적 계산’도 깔려 있다.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 군사·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대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중국으로서는 경제협력이라는 지렛대를 활용해 북한을 다시 자국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이고 북·러 밀착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
영국 가디언은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교량을 잇달아 개통한 데 주목하며 김 위원장이 두 우방국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으로서도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에 지나치게 의존하기보다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해 외교·경제적 선택지를 넓히는 것이 유리하다.
김 위원장의 방중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내 북·미대화 재개를 추진하는 가운데 내달 18~19일 중국 광둥성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뤄졌다. 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같은 해 3월과 5월 두 차례 중국을 찾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1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북·미 대화에 앞서 중국과 입장을 조율하고 외교적 지원을 확보한 것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달 중국이 트럼프와 김정은의 네 번째 정상회담을 중재할 의향이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은 북·미 대화가 재개될 경우 중재자 역할을 통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인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김 위원장 역시 중국과의 관계를 다져 미국과의 협상에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김 위원장이 직접 건넌 신압록강대교는 북·중관계 변화의 상징적 이정표다.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을 연결하는 길이 3026m, 왕복 4차로의 이 다리는 중국이 22억 위안을 들여 2014년 완공했지만 북한 측 연결도로와 통관시설 미비 등으로 12년간 개통되지 못했다.
그동안 북·중관계의 냉각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보여주는 시설로 여겨졌으나 지난 15일 정식 개통되면서 경제협력의 새로운 통로로 탈바꿈했다. 로이터통신은 신압록강대교가 중장비와 원자재, 에너지 제품 등의 대북 운송에 걸림돌이던 물류 문제를 완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낡은 중조(中朝·중국과 조선)우의교에 의존했던 화물 운송이 대형 컨테이너 차량의 양방향 통행이 가능한 새 교량으로 분산되면서 북·중 교역 확대의 물적 토대가 마련됐다는 얘기다. 왕 주석은 회담에서 신압록강대교 개통을 계기로 인적 왕래와 경제·무역 협력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김정은(앞줄 왼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24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을 방문해 헌화한 뒤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 CCTV 홈페이지 캡처
김 위원장도 양국의 역사적 우의를 계승하고 실무 협력을 강화해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주기를 희망한다고 화답했다. 하지만 북·중 경제 밀착에는 한계가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대북 제재가 여전히 유지되는 만큼 교량 개통이 곧바로 대규모 투자와 교역 확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통관시설의 안정적 운영과 인적 교류 정상화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의 방중은 북·중관계가 의례적인 혈맹 과시를 넘어 실질적인 경제협력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대북 영향력을 회복하고 북한은 경제적 활로를 넓히는 동시에 미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외교적 운신의 폭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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