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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감독탐구②]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과묵하다, ‘로제타’에서 ‘소년 아메드’까지

  • [데일리안] 입력 2020.08.07 14:08
  • 수정 2020.08.07 14:13
  •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장 피에르, 뤽(오른쪽) 다르덴 형제 ⓒ그린나래미디어㈜ 제공장 피에르, 뤽(오른쪽) 다르덴 형제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과묵하다. 쉴 새 없이 다른 영상과 소리, 효과를 화면 위에 채우는 영화들은 웅변가다. 목소리 높여 자기 주장을 역설하니 관객은 그저 청자일 수밖에 없다. 듣는 게 즐거운 작품도 있지만, 내용 따라가기에 급급한 영화도 있고 볼륨을 줄여 버리고 싶은 영화도 간혹 있다.


형 장 피에르 다르덴, 동생 뤽 다르덴은 벨기에의 형제 연출가이자 영화 제작자다. 노동자들의 일어섬을 다룬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시작해 흡사 다큐멘터리 카메라 같은 시선으로 우리 사회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에 느리고도 조용한 카메라를 들여놓는 영화들을 만들고 연출한다. 역사 속에서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 칸국제영화제가 무려 5번, 형제에게 상을 주었다. 그 가운데 2번은 황금종려상, 최고 영예였다. 1999년의 ‘로제타’, 2005년 ‘더 차일드’. 지난해 칸에서 영화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받을 때 감독상을 수상한 ‘소년 아메드’(수입·배급 영화사 진진)는 현재 국내 개봉 중이다.


취향에 따라 다소 지루하다고 할 수도 있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세계 영화인들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가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과묵하다. 그 과묵 속에서 우리는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저 인물은 왜 저러지? 꼭 저럴 필요가 있을까? 궁금해하기도 하고, 내가 그가 되어 이유를 찾아보기도 하고, 이해하려 애쓰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하며 영화를 볼 충분한 여유가 있다. 이 여유의 중요함에 대해 몇몇 영화들을 통해 차근히 말해 보려 한다.


영화 영화 '아들' 스틸컷 ⓒ㈜엔케이컨텐츠 제공

2002년작 ‘아들’부터 얘기해 보자. 소년원에서 나온 소년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가구제작훈련센터에서 소년들을 가르치는 남자 올리비에가 있다. 어느 날 목공반에 한 명을 더 받으라는 센터 직원의 요청을 “벌써 4명이나 가르치고 있다”며 거절한 올리비에. 어딘가 석연찮은 표정이다. 철공반으로 보내겠다는 직원의 말을 따라 철공반에 가보니 소년은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열여섯 살 프랜시스를 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올리비에, 선생님이라 부르며 열심히 목공일을 배우는 프랜시스. 카메라는 관객이 목공의 기초를 배울 만큼 천천히 올리비에의 찬찬한 수업, 학생들과 프랜시스의 배움을 보여준다. 열 마디 말보다 제대로, 우리는 올리비에의 인성과 프랜시스의 태도를 알게 된다.


올리비에는 자신의 차 안에서 아들을 잃었고 그 뒤 아내와 이혼했다. 영화가 인간적 유대감이 남아있는 두 사람의 이혼 사유를 굳이 밝히지 않지만, 아들을 죽인 소년을 대하는 태도의 극명한 차이에서 두 사람이 아들을 떠나보낸 뒤 겪었을 고통의 면면까지는 아녀도 강도는 짐작이 된다. 여자는 전 남편이 내 아들을 죽인 소년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만으로 의식을 잃는데, 남자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성실하게 지도한다.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남녀의 차이는 결코 아니다. 영화를 직접 보면 마치 소설 한 권을 통해 인물을 깊숙이 만난 듯, 올리비에라는 어른이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조용하지만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다르덴 형제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별다르게 예쁘게 굴지도, 힘주어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거나 참회하지 않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힘겨운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나가는’ 프랜시스라는 소년이 있다.


다르덴 영화의 단골배우 올리비에 구르메, 다르덴 영화의 단골배우 올리비에 구르메, '아들'로 칸 남우주연상 수상 ⓒ㈜엔케이컨텐츠 제공

계기도 없이, 배경도 없이 용서가 되나? 올리비에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성인군자인가? 이해도 용서도 쉽지 않지만, 어느 순간 다 내려놓고 그저 주어진 일과 삶에 충실한 올리비에를 지켜보는 나를 느낀다. 세파를 헤쳐나갈 힘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소년의 자기방어적 태도에 어쩐지 마음이 짠해지고 어쩌면 볼수록 정을 주고 있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영화관을 나설 즈음엔 ‘그래, 이 엄존하는 삶 앞에 이해나 용서는 작은 문제일 수 있겠지. 우리는 그저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다 며칠 혹은 몇 달 뒤 불현듯 어떤 깨달음과 마주하는 당신일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엔, ‘아, 영화나 드라마 대중예술 속에서 복수가 너무 쉽구나. 원인이라 할 사건이나 까닭에서 실행까지가 너무 빠르고 잔인하구나.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계라 해도 복수가 다양하게 반복되며 우리 의식에서 조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한 달 뒤쯤 떠올랐다. 흔히 복수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일인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말하려 할 때 처절한 복수가 부르는 참혹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복수하지 않는 한 아버지를 통해 조용히, 속삭이듯 말한다. 귀 기울이면 들을 수 있는 정도로.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도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느린 흐름으로 조명되는 인물들의 판단과 선택, 그 연속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에 화났던 내 마음이 누그러진다. 혹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잔상이 남아 마음의 다스림을 중시하는 나를 본다. 복수가 별것이겠는가, 나를 불편하게 한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복수다. 내려놓으면 내 마음에 평온이 깃들 수 있다, 올리비에처럼.


무명배우 시절 무명배우 시절 '로제타'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에일리 드켄 ⓒ 아이 앰 제공

다르덴 형제의 훌륭함은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 외에도 그들이 어디에 관심을 두느냐에 있다. 그저 다른 영화의 카메라가 들어가지 않는 곳인 게 아니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 현대사회를 병들게 할 중요한 문제지만 모른 척하고 있는 것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위에서 말했듯 조용하고도 느리지만 깊은 혜안으로.


‘로제타’에서는 내일 무엇을 먹을지, 이번 달 집세는 어떻게 낼지 고민하며 알코올중독 어머니까지 책임진 스무 살 안팎의 로제타가 주인공이다. 예쁘게 꾸미고 친구들과 놀고 앞으로 살아갈 인생 밑천을 다지는 ‘청춘의 특권’은 로제타에게 너무나 큰 사치. 당장 배를 채울 것을 구하고, 남들은 놀러 오는 캠핑촌의 낡은 캠핑카가 집이지만 집세가 하루라도 밀리면 수돗물을 끊어버리는 관리인이 있으니 로제타엔겐 돈이 필요해 보인다.


‘돈이 필요하다’가 아니라 ‘돈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적었다. 다르덴의 영화를 볼 때 처음엔 ‘내 기준’으로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알게 된다. 로제타가 원하고, 로제타가 필요로 하는 건 돈이 아니라 돈을 구할 수 있는 일자리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여기에 다르덴 감독이 우리에게 들려주고픈 생각이 있다. 진정 돈이 필요한 거면 돈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리고 힘없고 가난한 로제타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튼튼한 체력과 일을 잘한다는 자신감으로 일자리를 구하고자 한다. ‘사람의 선’을 지켜, 건강하고 떳떳한 노동을 통해 생계를 이어나갈 돈을 벌려 한다. 우리 사회엔 로제타보다 가진 것이 많으면서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손쉽게 하며 돈을 취하는 이들도 있다.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차일드' 스틸컷 ⓒ 스폰지 제공

로제타의 최종 목표가 일자리도 아니다. 로제타는 성실히 일해서 돈을 벌어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한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하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기도를 드린다.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 다른 이의 집에 하루 얻어 자면서도, 시멘트벽이 있는 집에서 설탕 묻힌 토스트로 저녁을 양껏 먹고 누워도 공간이 남는 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로제타는 행복해한다. 적어도 오늘은 평범한 저녁을 보냈음에 감격한다.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통해 ‘나는 저이보다 낫구나’라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안위를 주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종교나 정치의 해악 이상이다. 순수한 청년 로제타를 통해 우리는 노동의 건강함을 보고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다시금 상기한다.


또 ‘더 차일드’는 가난한 연인에게 찾아온 특별한 존재 ‘아기’를 마주하는 어린 엄마와 아빠의 차이가 빚어내는 위험천만한 소동, 아이를 통해 한 뼘 더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담았다. 사랑하니까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고 생각했다가 바로 그 사랑을 잃어버릴 뻔한 좀도둑 남자의 힘겨운 가족 찾기가 눈물겹다. 옷 넣어둘 옷장은커녕 내 몸 하나 누일 집 하나 없는, 아무것도 없는 한 남자를 통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마리옹 꼬띠아르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유명배우가 없어도 빛나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지만, 아니 영화와 현실의 벽을 부수기 위해 비전문 또는 무명 배우를 쓰는 다르덴 형제지만 마리옹 꼬띠아르가 함께하며 시너지 효과를 낸 작품이 있는데 ‘내일을 위한 시간’이다. 병가로 휴직을 했다가 복직을 앞둔 산드라. 산드라가 없는 사이 회사는 직원들에게 야근 등을 시켜 보충했다. 산드라가 복직하면 직원들에겐 ‘꿀’ 같은 연장근무수당이 사라진다. 회사에서는 투표를 실시했는데 산드라의 복직이 부결됐다. 투표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제보로 재투표가 결정되지만, 산드라는 주말 동안 16명의 직원을 찾아가 자신을 위해 투표해 줄 것을 설득해야 한다. 어제는 살가운 동료였지만 오늘은 그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상황. 한 사람씩 만나다 보니 그들에게 수당이 필요한 삶의 이유가 보이고, 산드라는 복직을 포기하고만 싶어지는데…. 산드라와 동료들을 갈라놓는 건 정말 돈일까. 근로자들의 대립, 노동 문제의 본질이 아주 쉽게, 마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처럼 흥미롭게 펼쳐진다.


‘언노운 걸’ ‘자전거 탄 소년’ ‘로나의 침묵’ 등 소개하고픈 영화는 끝이 없지만, 현재 개봉 중인 ‘소년 아메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시대의 중요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영화적으로 찾아내, 그 인물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찰해 내는 다르덴 형제가 이번에는 무슬림 소년 아메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는 이웃을 잘 모른다”는 말과 함께, 정부나 정책이 가려놓는 소외계층의 삶에 카메라를 들여놓고 서로를 알아가는 소통의 물꼬를 트는 형제다 보니 이민자 얘기가 다뤄진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번엔 종교, 믿음의 문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영화 영화 '소년'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제공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부합하는 인물에 관심을 지니고, 그 인물을 통해 오늘날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다르덴 형제는 지난 수년간 프랑스 파리와 터키, 벨기에 등지에서 발생한 테러 사건들을 보며 종교 극단주의에 빠진 소년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벨기에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중동 사람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가는 방법에 대해 이견이 생겼다. 쿠란을 통해 아랍어를 배워 이슬람교와 모스크사원을 지켜야 한다며 원칙을 중시하는 이들도 있고, 노래를 통해 생활 아랍어를 배워야 기도할 때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아랍어를 쓰게 된다고 융통성 있게 생각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소년 아메드는 극단적으로 원칙으로 고수하고 폭력마저 옹호하는 남자 이맘에게 경도된다. 명확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남편의 부재 속에 세 아이를 키우며 하루 몇 잔의 술을 마시는 엄마도 밉고 이슬람교도면서 히잡을 쓰지 않고 노출이 강한 옷을 입는 누나도 밉다. 형을 통해 이맘을 알게 됐지만 형과는 달리 이맘에게 빠르게 세뇌당하는 아메드의 마음엔 배교자를 처단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멋지고 잘생겼던 사촌형이 롤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이네스 선생님과 아메드 ⓒ영화사 진진 제공이네스 선생님과 아메드 ⓒ영화사 진진 제공

어린 시절 아메드의 난독증을 이기게 해 주었고 지금도 돌봄교실에서 수학 방정식을 가르쳐 주는 이네스 선생님이건만 이맘의 “배교자”라는 이간질에 소년은 칼을 준비한다. 다행히 아이에게 아이의 마음을 되돌려 주는 이들이 있다. 미수에 그쳐 소년원에 갇힌 아메드를 전담하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자신의 목장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가족, 상담사의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의 지켜봄과 보살핌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한다. 목장의 딸 루이즈는 날카로운 흔들림을 안긴다. 결정적으로 엄마의 사랑, 이네스 선생님의 아량이 아메드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린다.


영화 ‘소년 아메드’는 여느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그러하듯 아메드에게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해의 단초도 주지 않는다. 반성을 모른 채 설상가상의 계획을 준비하는 아메드에게 화가 나고, 아메드를 그렇게 만든 그 무엇에 분노가 인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메드는 왜 저럴까, 무엇이 지나치리만큼 착실한 아메드를 저렇게 만들었을까, 안타까움과 울화통의 롤러코스터를 타며 영화를 본다. 또 볼수록 아메드에게 마음이 간다, 평범하고 순수한 소년의 면모가 미움을 잊게 하고 뿔난 악마가 아님을 기억하게 한다. 영화를 어제 본 탓에 아직은 두 가지 정도에만 생각이 미친다. 하나는, 아이의 잘못은 어른의 책임이다. 다른 하나는, 타 종교를 배척하고 유일무이성을 주장하는 종교의 독단성은 폭력이다. 이슬람교만의 문제가 아니며, 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과 계층 그리고 인성에도 ‘나만 알고, 내가 제일’인 것은 폭력이다.


한국 관객들과 온라인으로 만난 다르덴 형제ⓒ영화사 진진 제공한국 관객들과 온라인으로 만난 다르덴 형제ⓒ영화사 진진 제공

글쎄, 지금으로선 얼마의 시간의 뒤에 어떤 깨달음이 ‘소년 아메드’를 통해 찾아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안다. 시대와 사회, 인간에 대한 깊은 안목을 지닌 다르덴 형제의 영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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