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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큰 어른...별이 된 구자경 회장 발자취(종합)


입력 2019.12.14 17:01 수정 2019.12.18 18:29        이홍석 기자

교사로 사회생활 시작...부친 부름에 기업가 길로

25년간 LG그룹 회장 맡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혁신과 자율·투명경영 주도...소탈·겸손 리더십

교사로 사회생활 시작...부친 부름에 기업가 길로
25년간 LG그룹 회장 맡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
혁신과 자율·투명경영 주도...소탈·겸손 리더십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LG
14일 향년 94세로 타계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교사를 꿈꿨지만 부친의 요청으로 기업인의 길로 들어선 뒤 45년간 그룹 경영에 몸담으며 LG를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려 놓은 기업가였다.

1970년부터 25년간 그룹을 이끌며서도 소탈하고 겸손한 리더십으로 혁신을 스스로 실천하는 경영인으로 재계의 귀감이 됐다.

교사로 근무하다 부친의 요청으로 기업가 길로

1925년생인 구 명예회장은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하던 1947년 부친 구인회 창업회장의 부름을 받아 일을 돕게 된다.

구 창업회장은 당시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이 날로 번창하며 일손이 모자라자 아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락희화학은 국내 최초의 화장품 '동동구리무'(럭키 크림)을 만들어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 사업을 도왔던 구 명예회장은 아예 회사로 들어오라는 부친의 요청에 따라 1950년 교편을 놓고 락희화학 이사로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에 들어섰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부산 연지동 LG화학 공장 앞에서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맨 왼쪽) 등 가족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부산 연지동 LG화학 공장 앞에서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맨 왼쪽) 등 가족들과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구 창업회장, 구평회 창업고문, 구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LG
구 명예회장은 '이사'라는 직함에도 현장경영에 직접 나섰다. 현장에서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는 등 생산과 판매를 직접 담당하면서 제대로 된 현장경험을 쌓았다.

구 명예회장은 락희화학과 금성사의 부사장에 이르는 동안 부산의 범일동공장, 부전동공장, 연지동공장, 온천동공장 등 시설확장의 중심에 한결같이 있으면서 현장 경영을 중시했다.

이러한 현장 중심 수업은 기존 총수 일가가 영업·기획이나 해외지사에서 출발해 실무를 익히다 임원을 거쳐 경영자가 되던 관례와 사뭇 다른 행보로 이러한 현장 경험들은 구 명예회장이 나중에 그룹 총수가 돼 화학과 전자 사업을 육성, 발전 시키는데 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그룹 2대 회장으로 글로벌 LG 반열에 올려 놔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69년 구 창업회장이 별세하면서 LG가의 장남 승계 원칙에 따라 경영을 이어받아 1970년 그룹 2대 회장에 올랐다. 이후 25년간 그룹을 이끌면서 럭키금성이었던 그룹을 LG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국토는 작지만 기술 경쟁력이 뛰어난 나라)이라는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연구개발(R&D)를 통한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아까지 않았다.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당시 구자경 명예회장.ⓒLG 1970년 1월 LG그룹 회장 취임 당시 구자경 명예회장.ⓒLG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고 1976년에는 국내 민간기업 중에서는 최초로 금성사에 중앙연구소를 만들었다. 전사 차원에서 설립한 이 연구소에 첨단 장비를 도입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들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를 집행했다.

구 명예회장이 1974년에는 금성사 디자인 연구실을,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1985년에는 금성 7개 계열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같은해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연이어 개설하는 등 재임기간 70여개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R&D 투자에 힘입어 LG그룹은 LG화학과 LG전자를 중추로 정보기술(IT), 부품·소재 등 다양한 영역으로까지 확대를 꾀할 수 있었다.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등이 구 명예회장 재임 시절 개발된 대표 제품들이다.

전자분야에서는 1975년 구미공단에 컬러TV를 연간 50만대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설립한 데 이어 1976년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1980년대에는 미래 첨단기술 시대를 내다보고 컴퓨터와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잇달아 만들었다.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수직계열화를 완성하고 1980년대 초 충북 청주에 종합 생활용품 공장을 건설했다. 구 창업회장이 플라스틱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1954년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에도 다시 진출, 현재 생활용품·화장품 업계 선두기업인 LG생활건강의 기틀도 닦았다.

구 명예회장의 시선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지난 1982년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설립하면서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등 재임 기간 50여개의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 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다.ⓒ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983년 2월 금성사 창립 25주년을 맞아 적극적인 고객 서비스를 위해 마련한 서비스카 발대식에서 서비스카에 시승해 환하게 웃고 있다.ⓒLG
민간기업 최초 기업공개 단행...투명·자율경영 체제 확립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 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혁신경영가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난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기업으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통해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었고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위기였다. 일부 임원들도 이러한 우려로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고 이를 적극 추진하며 투명 경영의 시초를 앞당겼다.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고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과 투명경영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자율과 책임 경영 확립에도 앞장섰다.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88년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하며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으로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서는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 개념이었다.

시행 초기 그룹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정 권한은 회장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계열사 사장들 또한 타율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해 회장을 찾아가 의사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구 명예회장은 '자율과 책임경영'이라는 혁신적인 경영체제 도입과 이를 정착시키는데 노력을 쏟아 부으며 LG그룹 전반에 전문경영인 경영 방식이 조기에 정착하는데 기여했다. 나아가 훗날 LG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수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선진화된 지배구조와 투명경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문화적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지난 1987년 5월 전경련 회장단들과 함께 농촌 모내기 일손을 도운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지난 1987년 5월 전경련 회장단들과 함께 농촌 모내기 일손을 도운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LG
무고 승계로 스스로 혁신 실천...은퇴후 소탈한 삶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87년부토 1989년 2년간 제18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재계의 큰 어른 역할도 충실히 수행했다. 그가 전경련 회장으로 재임한 1987∼1989년은 우리 사회의 격변기였다.

그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요청되는 때"라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설립하고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등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 1950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한지 45년만이었다.

부친인 고 구인회 창업주에 이어 지난 1970년 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한지 25년만에 스스로 수장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으로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구 명예회장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아직 은퇴할 나이가 아니었음에도 변화와 혁신의 물결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새 인물이 필요하고 그것은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이며 재계의 귀감이 됐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한 공장 생산라인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한 공장 생산라인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LG
그가 취임했을 당시였던 1970년 그룹의 매출은 260억원에 불과했지만 퇴임한 1995년에는 30조원 규모로 약 1150배 성장했다. 그의 퇴임에 앞서 그해 1월 럭키금성 명칭을 LG로 변경해 새 시대를 열어주면서 새 인물인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 후에도 이러한 소탈과 겸손의 마인드를 유지했다. 그는 은퇴 후 충남 천안시 성환에 있는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만 열성을 쏟으며 일상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이 은퇴 후 머물렀던 연암대학교의 농장 내 사무실도 대기업 그룹의 명예회장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공사장이나 작은 상가의 사무실로 여겨질 만큼 수수하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그의 마지막 길도 소탈과 겸손을 보여줬다. 94세를 일기로 별세한 구 명예회장의 장례는 생전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부인인 하정임 여사는 지난 2008년 1월에 별세했고 지난해 5월 장남인 구본무 회장까지 먼저 떠나보냈다.
지난 1995년 은퇴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버섯 재배를 연구하고 있다.ⓒLG 지난 1995년 은퇴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버섯 재배를 연구하고 있다.ⓒLG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걸어온 길

1925.4.24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출생(부친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4녀 중 장남)
1942.5 고 하정임 여사와 결혼
1945.3 진주사범학교 졸업, 지수초등학교 교사 부임
1950.5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 이사 취임
1952.4 동양전기화학공업사 설립, 대표 취임
1959.2. 금성사(現 LG전자) 이사 취임
1970.1 LG 제2대 회장 취임
1970.3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 취임
1973.6 학교법인 연암학원 설립, 이사장 취임
1974.3 연암축산원예대학(現 연암대학교) 설립
1975.5 한독경제협력위원회 초대 위원장
1976.2 금성정밀공업(現 LG이노텍) 설립
1976.9 독일연방공화국 유공대십자훈장 수훈
1978.3 럭키석유화학 설립
1979.2 한국발명특허협회 회장
1982.1 국내기업 최초 해외생산기지, 헌츠빌 법인 설립
1984.5 연암공업대학 설립
1985.1 안양 럭키금성 연구단지 준공
1985.6 금탑산업훈장 수훈
1986.4 럭키경제연구소(現 LG경제연구원) 설립
1987.1 STM(現 LG CNS) 설립
1987.2 전국경제인연합회 제18대 회장
1987.3 금성산전(現 LS산전) 설립
1987.1 여의도 LG트윈타워 준공
1988.11 LG인화원 개원
1988.11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 발표
1990.2 새 경영이념 선포
1990.3 LG트윈스 야구단 창단
1991.1 럭키금성복지재단(現 LG복지재단) 설립
1992.2 경영혁신 저서 『오직 이 길밖에 없다』 출간
1992.4 [럭키금성 고객의 달] 선포 및 행사 시행
1995.1 그룹명칭을 ‘LG’로 변경
1995.2 회장 퇴임 및 명예회장 취임
1996.4 원서동 자택 기증, 국내최초 전자도서관 LG상남도서관 개관
2019.12.14 향년 94세로 별세

이홍석 기자 (redstone@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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