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정희는 영화 '판도라'에서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정혜 역을 맡았다.ⓒ민관김 스튜디오
배우 문정희(40)에게선 밝고 긍정적인 기운이 넘친다. 건강한 에너지는 캐릭터, 극과 만나 훨훨 날아오른다.
그런 그가 '연가시'(2012)에 이어 '판도라'(감독 박정우)를 통해 또 한 번 재난영화에 도전했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문정희는 언제나 그랬듯, 제 몫을 해냈다.
국내 최초 원전 블록버스터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작 기간만 총 4년이 걸렸다.
최근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판도라'는 원전 폭발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한반도를 스크린에 담아냈다. 원전 문제를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만한 영화라는 호평을 얻었다. 문정희는 극 중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는 정혜 역을 맡았다.
정혜에 대한 캐릭터 설명은 거의 없다. 이 불친절한 캐릭터가 납득이 가는 건 문정희라는 배우 덕이다. 5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문정희는 "대사 몇 마디로 캐릭터가 처리돼서 야박하다고 투덜댔다"며 "아쉬웠던 건 사실"이라고 웃었다.
배우의 말마따나 정혜를 묘사한 장면은 별로 없다. 그래도 출연한 건 소재의 중요성과 박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박 감독의 연출 입봉작인 '바람의 전설'(2004)로 스크린에 데뷔한 문정희는 이후 '쏜다'(2007)와 '연가시'(2012), 그리고 이번 '판도라'까지 박 감독과 네 번째 호흡을 맞췄다.
문정희는 "사실 주변에선 '연가시' 때와 비슷한 캐릭터라며 출연을 말렸다"며 "소재에 대한 중요성과 박 감독이 재난 영화를 잘 만들 거라는 믿음이 있어 출연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원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영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어요. 배우로서, 그리고 또 한 사람으로서 말이죠. 앞뒤 안 보고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배우 문정희가 출연한 국내 최초 원전 블록버스터 '판도라'는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뉴
결혼 7년 차 주부인 그는 아이가 없다. 문정희는 그 어려운 모성애를 연기해야만 했다. 배우는 "모성애가 너무 어렵다"면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원전 상황에서 모성애까지 보여줘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영화엔 미처 담지 못한 캐릭터 설명을 이어갔다.
"정혜는 서울에서 경상도 시댁으로 시집온 여자예요. 남편, 시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도련님과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죠. 그동안 시댁에서 살면서 많이 힘들었던 여자라 시골 촌구석을 벗어나고도 싶어했죠. 어쩌면 시어머니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여자이기도 하고요."
시어머니 석여사(김영애)와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정혜는 시어머니를 잘 따른다. 아들을 잘 키워주기 때문이다. 그런 정혜는 원전이 폭발하고 피난길에 오를 때 시어머니에게 민감하게 반응한다. 극한 상황에 내몰리다 보니 그간 쌓인 감정이 터진 것이다.
문정희는 "관객들이 어떻게 볼까 궁금하다"면서 "그 상황에선 시어머니고 뭐고, 아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야 했다"고 했다.
영화에는 피난민, 복구조, 청와대 등 여러 장면이 맞물려간다. 문정희는 "각 장면이 보여주는 부분이 따로 있는데 감정 몰입이 쉬우려면 '세게' 표현해야만 했다"면서 "특히 설명이 별로 없는 정혜와 시어머니 상황에선 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정혜와 시어머니의 이야기가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그래도 여성의 코드가 있는 건 마음에 들었다"고 미소 지었다.
배우 문정희는 영화 '판도라' 출연 계기에 대해 "적은 분량이라 아쉬웠지만 박정우 감독님을 믿었고, 소재도 마음에 들어 출연했다"고 밝혔다.ⓒ뉴
영화가 보여준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 아수라장이 된 대한민국은 공포로 다가온다. 최악의 재난을 간접 경험한 배우는 "영화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원전에 대해 잘 몰랐었다"며 "영화를 찍으면서 모르는 부분을 알게 돼 무서웠고, 이제야 원전의 심각성을 알게 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했다.
"한국엔 인재(人災)가 많아요. 무언가 감추려고만 급급했기 때문이에요.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정보를 공개했으면 좋겠어요. '판도라'는 배우들의 연기보다는 '재난'에 초점을 맞춘 영화예요. 저도 큰 역할을 아니지만 어떻게든 영화의 주제를 알리고 싶어서 홍보 인터뷰를 자처하게 됐어요."
배우는 또 "재난은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젠 먼 얘기가 아닌데 한국에서는 다들 돈 버느라 바빠서 재난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하다"고 안타까워했다.
1998년 연극 '의형제'로 데뷔한 문정희는 '바람의 전설'(2004), '연애시대'(2006), '달콤한 나의 도시'(2008), '연가시'(2012), '숨바꼭질'(2013), '마마'(2014), '카트'(2014), '달콤살벌 패밀리'(2015) 등 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그간 문정희는 '누구누구의 친구', '누구의 엄마' 등으로 소비됐다. 배우는 "엄마가 아닌 여자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판도라'가 저한테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작품을 하는 건 운명이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여성 캐릭터가 가진 기능적인 부분이 아쉽죠. 그렇다고 아무 캐릭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역할보다는 작품을 먼저 보는 편이에요.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데 국내 영화계에선 힘든 일이죠. 그런 작품조차 없으니까."
문정희의 말처럼 여배우가 주축이 된 작품은 스크린, 브라운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스크린에선 더욱 그렇다. 최근 엄지원, 공효진 주연의 '미씽: 사라진 여자'가 개봉하긴 했으나 영화관에 가면 남자 배우들이 가득한 작품들이 많다. 작품을 기다려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라지만, 마냥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는 마음에 안 든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영화 '판도라'에 출연한 문정희는 "영화를 통해 원전의 심각성을 알리고 싶었다"고 전했다.ⓒ뉴
"기회를 엿봐야 합니다. 외국에서는 유명한 분들이 제작자로 나서곤 해요. 저도 콘텐츠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시나리오 작업에 관심이 가기도 하고. 호호. 여성을 면밀히 들춰보고 싶어요. '누구의 언니'가 아닌 여성, 독자적인 캐릭터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말이죠.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뭐라도 시도하고 싶습니다. 안 하면 후회할 거 같거든요. 경쟁력을 가르고, 저만 보여줄 수 있는 색을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이 당찬 배우에게 구상하는 이야기가 있느냐고 물었다. 배우는 "틈틈이 메모하고 있는데 시나리오 구조를 짜는 게 쉽지 않다"며 "가족 간의 미묘한 갈등을 다룬 사람 이야기를 생각 중이다"며 부끄러워했다. "가족 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웃지 못할 일들도 생기고요. 그런 부분을 담고 싶어요. 제가 춤도 좋아하니깐 음악 이야기도 꿈꾸고 있어요(웃음)."
문정희는 "연기를 하고 있어도 계속 목마르다"고 했다. 지치고 힘들다가도 '연기'만 생각하면 에너지가 샘솟는다. "작품을 할 때는 순간순간이 좋고 달콤해요. 다른 작품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관객들도 이런 제 모습에 공감했으면 하고요. 이번 '판도라'를 본 관객들이 많은 얘기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문정희는 최근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안 가면 안 될 것 같았다"며 "지금 사태가 해결 돼야 우리도 먹고 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소신을 밝히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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