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천우희는 영화 '해어화'에서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연희 역을 맡았다.ⓒ롯데엔터테인먼트
2014년 열린 청룡영화제에선 한 여배우의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됐다. '한공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천우희(28)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유명하지도 않은 제가..."라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이어 "이렇게 작은 영화가, 이렇게 큰 상을 받다니...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주시는 것 같아요"라고 진심을 꾹꾹 담아 말했다.
배우의 수상 소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한공주'로 많은 영화제를 휩쓴 천우희는 상의 무게를 느낀 탓인지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고 토로했다.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을 거듭하던 배우는 '나다운 방식으로 날 지켜내자'는 심지 굳은 의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영화 '해어화'(감독 박흥식·13일 개봉)로 스크린에 돌아왔다. 2004년 '신부수업' 단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천우희는 '마더'(2009)의 진태 여자친구, '써니'(2011)의 본드걸, '카트'(2014)의 점원, '한공주'(2014)의 공주 등 출연하는 작품마다 깊은 인상을 남기는 캐릭터를 구축했다.
작품은 강했고, 캐릭터도 셌다. 대중이 떠올리는 천우희의 이미지도 그랬다. 따뜻한 봄날 마주한 천우희는 천생 여자, '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해어화'는 1943년 비운의 시대, 최고의 가수를 꿈꿨던 마지막 기생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았다. 천우희는 극 중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타고난 목소리를 가진 연희 역을 맡았다. 주인공 소율(한효주)과는 둘도 없는 친구지만 소율의 연인 윤우(유연석)와 엮이면서 셋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배우 천우희는 영화 '해어화'에서 연희 역을 맡아 한효주, 유연석과 호흡을 맞췄다.ⓒ롯데엔터테인먼트
천우희는 곱디고운 한복을 입고 맑은 목소리를 뽐낸다. '예쁘고 곱다'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천우희는 세다'는 단박에 날린 셈이다.
"항상 듣는 얘기가 있어요. '천우희는 우울하고 어려운 영화만 한다'는 거죠. 밝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 꾸민 모습으로 나왔는데 이런 것도 잘 어울린다고 얘기해주시니 기분 좋아요. 호호. 새로운 모습을 보일 때가 온 것 같아요(웃음)."
관객의 눈으로 시나리오를 본다는 천우희는 캐스팅 제의를 한 차례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노래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지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단번에 내키진 않았다"며 "주위 권유도 있었고 이번엔 변해야겠다는 내 다짐도 반영해 마음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연희는 일제 강점기 때 고통받는 민중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즐거움을 안겨 주는 대중가요를 부른다. 대중의 가슴을 건드리는 가창력과 감성은 필수였다. 캐릭터를 위해 천우희는 4개월 동안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발성, 1940년대 창법, 트로트를 익혔다.
천우희는 노래 연습 중 눈물을 쏟았던 일화를 소개했다. "1년 전쯤 일 거예요. 제 생일 때 연습실에서 연습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 거예요.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뜻대로 안 돼서 울었답니다."
'해어화'는 한효주, 천우희 두 여배우가 끌고 가는 영화이지만 한효주가 맡은 소율이의 감정선이 훨씬 더 섬세하게 그려졌다. 소율에 비해선 연희의 모습은 단적이다. 천우희는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해야 연희를 대변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토로했다.
영화는 삼각관계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소율에게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던 윤우의 변심, 둘도 없는 동무의 남자를 뺏은 연희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배우는 어떻게 생각할까.
영화 '해어화'에서 연희 역을 맡은 천우희는 캐릭터를 위해 4개월간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롯데엔터테인먼트
"소율, 연희, 윤우 세 사람 모두에게 연민이 느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희 입장에선 표현하는 부분들이 적어서 이해하기 어렵기도 했고요. 연희와 윤우의 감정이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감독님께서 사람의 이기심과 욕망에 중점을 두라고 하시더라고요. 연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하려고 애썼어요."
삶에 소극적이었던 연희는 친구의 연인 연우를 통해 꿈과 사랑을 본다. 해서는 안 될 사랑이었지만 연희에게는 그 어떤 사랑보다 소중했다. "윤우는 연희가 세상과 만나게 해준 사람이에요. 윤우를 통해 삶을 의욕적으로 살게 되고 재능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만 사랑하면서 자기 꿈을 찾고 성장했죠."
천우희는 '조선의 마음' 1절 가사를 직접 작사하기도 했다. '조선의 마음'이라는 제목엔 연희의 마음과 시대적 아픔을 담아야 했다고. "감독님께 여쭤봤더니 흔쾌히 가사를 써보라고 하셨어요. 다행히 반응이 좋았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자신감으로 작사했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하하."
수준급 노래 실력을 자랑한 천우희에게 평소 가무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가족이 음주가무를 좋아한다"며 "집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명절 때 다 같이 노래 부르면서 논다"고 웃었다.
'음악 영화에 또 출연할 생각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영화를 준비하는 동안 다신 안 할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니 이전보다 성장한 내 모습을 보게 돼 뿌듯했다"며 "뮤지컬 영화든 음악 영화든 한 번 더 도전하고 싶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동갑내기인 천우희와 한효주는 묘한 인연이 있다. 한효주는 '감시자들'로 2013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천우희는 '한공주'로 이듬해인 2014년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천우희는 한효주의 전작 '뷰티 인사이드'에 출연하기도 했다.
한효주는 천우희에 대해 "보석 같은 배우"라며 극찬한 바 있다. 여배우 특유의 기싸움이 없었는지 물었다.
영화 '해어화'에서 연희 역을 맡은 천우희는 '독보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롯데엔터테인먼트
"10개월 동안 효주 씨랑 함께했는데 둘 다 체력적으로 힘들었어요. 상대방을 신경 쓰기에도 지쳤던 적도 있는데 촬영 끝날 때쯤 효주 씨랑 술 한잔 하면서 얘기했어요. 서로 챙겨주기에도 미안했다고. 느끼는 부분이 비슷했답니다."
범상치 않은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천우희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는 "뚜렷한 강점을 중요시한다"며 "소박하고 훈훈한 영화가 좋을 때도 있고, 보는 즐거움이 있는 영화도 좋다"고 미소 지었다.
'해어화'의 개봉을 앞둔 그는 "대중의 평가에 대해선 연연해 하지 않는다"면서 "잘 됐으면 하는 소망은 있지만 모든 비판과 결과는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강조했다.
"평가와 성적을 신경 쓰면 위축되고 연기에 집중하지 못해요. 개봉하는 순간부터 마음을 비우고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놓아 버린답니다. '이제 보내줘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요."
햇살처럼 맑은 천우희는 쑥스러움도 많고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이 그런 연기를 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전 흥이 많은데 주위에서 배우 느낌을 지키라고 하죠. 최대한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흐흐. 2년째 여행을 못 가고 있어요. 스페인 이비자에 가서 젊음을 불태울 거예요!"
지난해 쏟아지는 상을 받은 그는 괴로운 시기를 거쳤다.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해야 했던 터라 소심해졌단다. 자유로운 이 배우는 많은 상황이 불편했고 갇혀 있다는 느낌에 답답했다. 서른 살이 된 천우희는 20대와는 다른, 30대를 꿈꾼다.
"많은 게 제한돼 있던 시기였죠. 올해부터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를 지키고 중심을 잡으려고 했어요. 그 시기를 지나고 보니 저 자신이 더 단단해졌답니다. 무모하고 과감해 보일지라도 '천우희만의 길'을 만들고 싶어요."
영화 '해어화'에서 연희 역을 맡은 배우 천우희는 "연기와는 타협 없다"며 "끝을 보겠다"고 강조했다.ⓒ롯데엔터테인먼트
문근영, 김예원 등 동갑내기 친구들도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천우희는 "오랜만에 모여서 힘들었던 경험을 얘기했는데 다들 공감했다"며 "'나만이 아닌 누구나 겪는 일이구나', '인생의 한 문턱'이라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됐다"고 했다.
천우희에게 관심사를 물었다. '연기'라는 모범생 답변이 나왔다. 가방, 구두 등 패션에는 관심이 없단다. "'물욕'은 없어요"라고 '천생 배우'는 웃었다. 그리고 '진짜 배우'다운 연기 철학을 읊었다. 서른 살의 이 배우에서 나온 연기관은 흔들림 없었다. 순간 눈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연기와 타협하지 않아요. '이번엔 아쉽지만 다음에 잘해야지'라는 생각은 안 합니다. 주어진 작품에 최선을 다해요. 주변에서 괜찮다고 해도 전 쉽게 안 넘어가요. 인간은 한계가 없어서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려고 노력해요. 연기는 머리 터지게 합니다. 끝까지 가볼 생각으로."
최종 꿈은 '독보적인 배우', '믿고 보는 배우'다. 어떤 수식어가 불을지 모르지만 오로지 '연기'로만 말하는 배우, 그게 천우희가 바라는 바다.
천우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잠자기 전에 하루를 정리하는 글을 쓴다. 일기를 비롯해 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적은 연기 일지가 차곡차곡 쌓였다.
"일기를 보면 한해를 돌아보게 돼요. 저만을 위해 쓴 건 아니에요. 연기 지망생들이 제게 '천우희 씨를 보고 희망을 본다'고 했거든요. 저 역시 희망을 보고 책임감을 느껴요. 작은 부분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유일한 관심사가 연기이고, 하루를 연기로 마무리하는, '연기 바보' 천우희에게서 한국 영화의 희망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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