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는 모래성"…조재현의 씁쓸한 고백

부수정 기자

입력 2016.02.01 09:03  수정 2016.02.11 08:35

'파리의 한국남자'서 사라진 아내 찾아 헤매는 남편 상호 역

"작가주의 영화 사라지는 현실 안타까워…시장 변화 필요"

배우 조재현은 영화 '파리의 한국 남자'에서 실종된 아내를 찾아 헤매는 남편 상호 역을 맡았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영화 개봉이 마냥 유쾌하지 않아요."

'파리의 한국 남자'(감독 전수일·1월 28일 개봉)를 들고 스크린에 돌아온 조재현(50)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자신이 찍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언론 인터뷰에 나선 배우들은 대부분 설레고 긴장된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조재현은 달랐다. 시종일관 담담했고 "이런 인터뷰 자리도 신이 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그는 왜 이런 말을 꺼냈을까. '파리의 한국 남자'는 신혼여행지 파리에서 실종된 아내 연화(팽지인)를 2년간 찾아 헤매는 남자 상호(조재현)의 이야기다. 영화는 가장 행복한 순간 갑자기 찾아온 비극을 통해 인간의 삶과 운명을 이야기한다.

'검은 땅의 소녀와'(2007)로 베니스국제영화제, 도빌아시아영화제, 프리부르국제영화제 등에서 17개의 상을 받은 전수일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전 감독이 프랑스 유학 당시 지인에게서 들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는 2014년 8월에 촬영이 끝났으나 1년 5개월 만인 지난달 말에서야 극장에 걸렸다.

조재현과 전 감독은 '내 안에 우는 바람'(1997), '콘돌은 날아간다'(2013)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췄다. 전 감독은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화들을 연출해왔다. 상업영화가 추구하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조재현과 전 감독은 현재 경성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조재현은 "전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며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좋다"고 했다.

'파리의 한국남자'는 조금은 불친절한 영화로 비칠 수 있다. 대사도 많지 않고 인물의 행동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결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운명과 삶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극 중 상호는 아내가 누군가에 의해 납치돼 매춘부로 팔려갔다고 생각하고 2년간 홍등가를 뒤진다. 노트르담 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상호의 삶은 고단함의 연속이다. 아내를 찾는 일은 일상이다. 지친 듯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하루를 버텨내는 상호를 보노라면 안쓰럽다.

행복한 순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상호의 이야기는 삶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배우 조재현이 영화 '파리의 한국 남자'로 스크린에 돌아왔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조재현은 "파리의 노숙자 캐릭터에 매력을 느꼈다"며 "실제 노숙자들이 돈을 받고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상호의 시선을 따라간다. 어렵고 독특한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꿈이든 현실이든 상호는 홍등가에서 본 아내를 데려오지 않았을 거예요. 캐릭터를 분석하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골'만 아파요. 내용에 대해 감독에게 따지면 충돌이 시작되고요. '상호는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라고 확신하며 연기했습니다."

이후 조재현은 말을 이어갔다. 대본을 받고 캐릭터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시작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현장에서 '이해 안 된다'고 얘기하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감독은 운동복을 재단했는데 제가 턱시도를 입을 순 없잖아요. 감독과 생각이 맞지 않으면 그 길은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의문이 있으면 미리 얘기해야 해요. 뒤늦은 충돌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영화는 프랑스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흔히 떠오르는 파리의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공간은 없다. 어두운 공간, 홍등가, 포르노 극장, 허름한 성곽이 있는 집시들의 초원까지 파리의 구석구석이 어둡고 쓸쓸하게 나온다.

상호는 연꽃버스 매춘 골목 여성, 여장 남자, 노숙자, 동성애자, 집시 등 사회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일부가 된다.

조재현은 촬영이 끝난 후 파리 길바닥에서 커튼 한 장에 의지한 채 잠을 청하기도 했다. '너무 한 건 아니냐'는 생각도 들 법한데 이 배우는 "촬영 환경이 열악하다고 불만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럼 애초에 파리에 오지 말았어야죠. 이것저것 따지면 안 돼요. 전 커튼을 준 스태프에게 감사하기만 했는 걸요."

그는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영화는 상업영화보다 독립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배우로서 흥행이 보장된 상업영화에 욕심이 날 듯도 하다. 조재현은 "배우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게 내 가치관"이라고 했다.

배우 조재현이 출연한 영화 '파리의 한국 남자'는 신혼여행지 파리에서 실종된 아내 연화(팽지인)를 2년간 찾아 헤매는 남자 상호(조재현)의 이야기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전 상업적이지 않은 대신 자유로워요. 나중에 '조재현 안 팔리니까 연극으로 빠지는구나'라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연극도 꾸준히 하고 있죠. 김기덕, 전수일, 전규환 등 작가주의 감독과 계속 작업을 해와서 부담이 없기도 하고요. 독립영화의 자유로운 매력에도 끌려요."

그러면서 한국 독립영화계의 우울한 현실을 토로했다. "영화 홍보 인터뷰가 신이 안 나요. 영화가 걸릴 극장이 없으니까요. 뻔해요. 들어갔다가 곧 사라질 거예요. 모래성을 쌓았는데 파도 한 번에 사라지는 분위기랄까요? '언제 개봉했니?'라는 얘기도 듣고요. 모래성이 무너진 걸 여러 차례 봤는데...참 씁쓸하죠."

천만 영화가 두 작품이나 나올 정도로 한국 영화계는 성장했지만 정작 저예산 독립영화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대형 배급사들이 제작, 배급을 맡은 상업영화들만 극장에 걸리고 독립영화가 배정된 극장은 달랑 10곳 미만이다. 그것도 조조시간대. 3일 이후엔 이마저도 사라지고 없다.

참담한 현실을 마주한 조재현은 '지-시네마(G-Cinema)를 통해 독립영화에 힘을 실기로 했다. '지 시네마'는 경기도와 고양시, 영상기업체가 자금을 모아 중·저가 예산영화에 투자하는 경기영상펀드의 도움을 받는 영화다.

조재현은 극장 황금시간대인 오후 6시, 8시대 영화 티켓을 1년 치나 샀다. '풍덩'하고 빠지고 마는 독립영화의 현실을 그냥 바라만 보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작은 도시 2개 관, 큰 도시 2~3개관만 확보하면 독립영화 전용관이 점차 늘어나는데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 영화인들이 대부분이다.

"상업영화 제작자들도 한숨 쉬곤 해요. 김기덕, 홍상수, 이창동 이후에 작가주의 감독이 끊겼어요. 사실 어쩔 수 없어요. 생존이 불가능하거든요. 처음에 작가주의로 나갔다가 중간에 상업영화로 돌린 감독들을 욕할 순 없어요. 전수일, 전규환 같은 감독이 살아남은 건 기적이에요."

영화 '파리의 한국 남자'에 출연한 조재현은 독립영화가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사정이 이러하니 세계 3대 영화제(베를린·칸·베니스)에서 한국 영화의 씨가 마를 지경에 이르렀다. 돈 들여서 영화를 만들었더니 "살기 너무 힘들다"는 말만 한다. 전 감독도 대출에 손을 뻗어 영화를 만들었다. 작가주의 감독들은 거의 '노숙자'라는 조재현의 말이 쓸쓸하게 들렸다.

아무리 어렵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작가주의 감독들을 기다리는 관객들은 있다. 조재현은 "'파리의 한국 남자'는 실망을 주지 않는 영화가 될 듯하다"며 "영화가 걸리는 극장만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고 소박한 바람을 드러냈다.

조재현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연기자로 활동 중인 조혜정이다. 지난해 조혜정은 아빠 덕에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는 '금수저 논란'에 시달린 바 있다.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자 조재현은 "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예전에 보던 댓글은 어느 순간부터 피하게 됐다고.

논란은 또 있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 경기영상위원회 위원장과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을 맡은 이력을 두고 일부 누리꾼들이 조재현을 친 새누리당 인사라고 지적한 것이다.

조재현은 "정치색을 단정하는 댓글을 본 이후부터 댓글을 안 본다"며 "여러 논란 때문에 마음이 곪아 터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 올린 작품으로 드라마 '피아노'(2001)와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2002)를 꼽았다. 두 작품이 없었다면 지금의 조재현은 없었을 거라고. '나쁜남자'는 김 감독 최고의 흥행작이다.

잘 사는 연예인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조재현은 실제 모습과 다르게 어둡거나 거칠고 결핍이 있는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부잣집 회장님 역은 어떠냐고 물었다. "이젠 재벌 역할 좀 하고 싶은데 캐스팅 제의가 안 들어오더라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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