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 "'히말라야', 지독하게 외로웠다"

부수정 기자

입력 2015.12.14 09:18  수정 2015.12.21 08:38

엄홍길 대장·고 박무택 대원 실화 산악 영화

"책임감에 힘들기도…산보다 중요한 건 사람"

배우 황정민은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 대장 역을 맡았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국제시장', '베테랑'으로 쌍천만 흥행 배우로 등극한 황정민(45). 영화 '히말라야'(감독 이석훈·16일 개봉)는 그에게 큰 도전이었다.

황정민은 "모든 촬영을 마친 후 야외 세트장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엉엉' 울었다. 창피할 정도로 오열했는데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히말라야 등반 중 생을 마감한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목숨 건 여정을 떠나는 엄홍길 대장과 휴먼 원정대의 도전을 그렸다. '빙우'(2004) 이후 10년 만에 나온 산악 영화로 제작진과 배우들은 거대한 히말라야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배우, 제작진은 산악 전문가와 함께한 사전 훈련은 물론 네팔 히말라야, 프랑스 몽블랑 현지 로케이션에 참여했다. 네팔 히말라야의 4500m 정도까지 등반하는가 하면 몽블랑에도 올랐다. 거친 눈보라, 매서운 추위에 배우들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10일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산악 영화가 처음이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야 했다"며 "제작진과 출연진이 매일 회의하면서 촬영했다"고 말했다.

이석훈 감독과는 '댄싱퀸'(2012) 이후 두 번째 만남이다. '댄싱퀸' 스태프가 합류한다는 소식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황정민은 "한 번 같이 했던 팀과 재밌게 놀아보자는 마음에 선택했는데 큰코 다쳤다"며 "오랜만에 나온 산악 영화라 처음엔 열의와 애정을 쏟다가 갈수록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이건 아닌데' 싶었다"고 웃었다.

영화 '히말라야'에서 엄홍길 대장 역을 맡은 황정민은 극심한 외로움과 싸웠다고 토로했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신의 영역 히말라야. 8000m가 넘는 세계의 지붕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서 직접 봐야 합니다. 대자연을 마주하니 인간이 한없이 왜소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눈물이 나올 만큼 장관인 풍경도 봤는데 한 번쯤 가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웃음)."

히말라야 현지 로케이션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장비와 짐을 들고 3000m까지 걸어 올라갔을 땐 숨이 가빠졌다. 헬기를 타고 가면 고산병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부러 힘든 길을 택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고행길을 걸었다.

워낙 위험한 촬영인 터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긴장감, 불안감, 응원의 목소리가 뒤엉켰다. "몽블랑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허벅지까지 찬 눈을 헤치고 지그재그로 내려가는데 아찔했어요. 촬영 끝나고 다시 숙소로 올라오는 길도 고역이었죠(웃음)."

엄 대장 역의 황정민은 고참 선배로서 현장을 이끌었다. 다들 황정민에게 '엄 대장님'이라고 불렀고 황정민 역시 엄 대장을 닮아 갔다. 의도한 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쓴 덕분이다.

엄청난 부담감, 책임감이 배우를 짓눌렀다. 황정민은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며 "무너지면 안 되니까 '힘들다'라는 말 한마디도 안 했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미친 듯이 걸었다"고 했다.

자괴감도 몰려왔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난 그냥 배우일 뿐인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다들 힘들었기 때문에 '하루만 쉬자'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죠. 촬영 현장의 모든 걸 제가 챙겨야 했는데 정말 외로웠어요. 누구한테 털어놓지 못하고 저 혼자 견뎌냈어요. 촬영 끝나고 방에서 혼자 술 마시면서 눈물을 쏟았답니다. 흐흐. 7개월 동안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너무 컸나봐요."

황정민이 주연한 영화 '히말라야'는 히말라야 등반 중 생을 마감한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목숨 건 여정을 떠나는 엄홍길 대장과 휴먼 원정대의 도전을 그렸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모든 촬영이 끝나자 아무 사고 없이 잘 마쳤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황정민은 그간 자신을 옭아맨 책임감, 부담감을 눈물과 함께 흘려보냈다.

촬영 전 엄 대장은 그에게 무슨 조언을 해줬을까. 황정민은 "속내를 안 드러내시는 분이라서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다. 근데 내가 엄 대장 역을 맡고 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 너무 외롭고 힘드셔서 오히려 말을 안 하신 듯하다. 말 못할 사연, 심정을 영화를 통해 조금 이해했다"고 했다.

다른 산쟁이들의 도움을 받은 황정민은 친해진 산쟁이에게 "도대체 그런 힘든 곳을 왜 오르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은 "그럼, 형은 배우 왜 하세요?"였다. 말문이 막혔다. 이유 없이 그냥 좋아서 하는 거라는 단순명쾌한 진리였다.

함께한 '히말라야' 원정대 조성하, 정우, 김인권, 라미란, 이해영, 전배수, 김원해 등과는 전우애 같은 끈끈한 정을 나눴다. 고된 촬영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다.

"너무 추워서 서로 똘똘 뭉쳐 다녔는데 동료애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매서워도 다 같이 손 잡고 가서 무섭지 않았어요. 숙소로 돌아가 배우, 스태프 모두 환호성을 질렀죠. 술도 매일 마시면서 정말 친해졌죠. 하하."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관련 다큐멘터리는 대중에게 익숙하다. 이미 결말이 알려진 이야기라 다큐와는 다른 영화적 재미를 전달하는 게 가장 큰 숙제였다. 영화표를 사고 보러 온 관객에게 다큐와 똑같은 작품을 보여줄 순 없다. 실화를 이길 수도 없고 뭔가 다른 요소를 제시하는 시간이 고통스러웠다고 배우는 말했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할 거냐고 감독에게 짜증도 냈어요. 마음의 짐을 떠안아서 옷을 입어도 내 옷이 아닌 기분이 들었어요. 촬영 초반까지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가 우연히 엄 대장님의 '약속'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일부런 안 읽었는데 한없이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 다짐했죠. 실화에 대한 부담은 안고 가되 '산'이 아닌 '사람'을 다루자고요."

영화 '히말라야'에 출연한 황정민은 촬영을 마친 후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결국엔 '사람'이었단다. 복잡했던 상황들이 뻥 뚫렸고 이야기가 매끈하게 풀렸다. 정상만을 보는 게 아닌 사람을 보고 가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라면 산쟁이들의 발걸음부터 다를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산보다 위대한 건 사람'이라는 명언이 황정민의 입에서 나왔다. "히말라야에는 시체가 많아요. 시체를 밟고 지나가는 일도 다반사고요. 영화는 이 부분에 중점을 뒀어요. 사람을 지나치지 말자는 거죠."

40대 중반에 접어든 그는 유독 고생을 사서 하는 듯하다. 체력도 달릴 법한데 이 배우는 "일할 때가 가장 재밌다"며 소년처럼 웃은 뒤 "선배로서 갖는 부담감, 책임감은 '히말라야'를 통해 겸허히 받아들였다. 이번 작품은 내게 큰 공부가 됐다. '히말라야'가 없었다면 새로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황정민은 뮤지컬 '오케피'(18일 초연)의 연출 겸 지휘자 역할을 맡았다. 올 초 '국제시장', 여름 '베테랑', 연말 '히말라야'·'오케피'까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무엇보다 2015년은 그가 2000만 흥행 배우로 등극한 특별한 해다.

"제 인생에서 2015년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런 경우가 드물어서 참 감사해요. 관객들이 제게 거는 기대는 기쁘게 받아드리겠습니다(웃음).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부수정 기자 (sjboo71@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