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휙휙 돈다. 운전석에서는 말도 안 통하는 일본인 아저씨가 열심히 스티어링 휠을 돌리고 있고, 그의 제어에 따라 차체는 멀쩡히 앞으로 굴러가라고 만들어놓은 바퀴를 옆으로 질질 끌며 회전을 해댄다. 아스팔트와 타이어의 진한 포옹으로 인해 주변은 건강에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연기로 가득하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맞은편에서 또 한 대의 차량이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쯤이면 '내가 왜 이런 일을 자청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의 차량은 토요타의 경량 스포츠카 '86'으로, 이 차량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드리프트(DRIFT) 체험을 신청했다가 그 꼴을 당했다.
'이니셜 D'보다 과격한 드리프트
한국토요타는 18일 국내 출시를 앞두고 지난 15일 전남 영암 서킷에서 기자들을 데려다 직접 86을 몰아보도록 시키고, 일본에서 모셔온 프로 레이서 옆에 앉혀 과격한 서킷 주행으로 겁도 주고, 앞서 언급한 드리프트 체험으로 멘탈을 뒤흔들어놓았다.
이날 드리프트를 담당한 일본인 레이서들은 기자들을 태운 채로 두 대의 차량이 거의 바짝 붙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원을 그리는 드리프트를 시연했다. 마치 얼음판 위에서 차량을 굴리는 듯한 과격한 시연이었다.
일본 만화 및 애니메이션 '이니셜 D'를 접한 사람이라면 86은 그다지 낯설지 않은 이름일 것이다. 이니셜 D는 9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만화로 연재가 시작돼 지금까지 자동차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극중에서 주인공인 후지와라 타쿠미가 두부배달을 위해 사용하던 차가 토요타 86의 전신인 'AE86'이고, 굽이진 산길을 빠르게 주행하면서도 두부를 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기술이 드리프트다.
드리프트 체험을 신청한 죄로 졸지에 두부배달 차에 실린 두부 꼴이 됐지만, 이니셜 D에서 AE86에 실린 두부가 멀쩡했던 것처럼 현실에서 86에 실린 기자도 별 탈 없이 제 발로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AE86은 이니셜 D에서의 등장 시점에서도 이미 상당한 고물로 여겨진 모델로, 첫 출시 시점은 1983년이다.
토요타가 30년 가까이 된 모델의 이름을 부활시킨 배경에는 AE86에 쏟아졌던 스포츠카 마니아들의 성원을 다시 한 번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사실 86은 AE86과 전혀 닮지 않았다. 외양뿐 아니라 엔진, 트랜스미션 등 어느 것 하나 비슷한 게 없는 전혀 다른 차다.
타다 테츠야 토요타 수석엔지니어가 토요타 86의 개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차량 중 왼쪽은 이번에 출시된 86, 오른쪽은 이니셜 D에 나오는 AE86.
애매한 포지션…대체 왜 이런 차를?
그렇다면 일본과는 문화적 배경이 다른 국내 소비자들에게 86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많이 팔릴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다만, 드라이빙을 사랑하는 고객들에게 더 큰 즐거움을 주고, 그것을 통해 토요타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일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나카바야시 히사오 사장은 86 드라이빙 테스트 전날 만찬에서 한국에서의 판매 목표에 대한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공부 안했는데 큰일났다'고 설레발쳐놓고는 은근히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비호감 우등생의 재수 없는 멘트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한국토요타 직원들은 86의 판매대수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86은 볼륨카(수요층이 넓은 차)도 아닌데다, 수요층을 스포츠카 마니아로 한정한다 해도 포지션이 다소 애매하다.
스스로 규정한 '경량 스포츠카'라는 차급과 2.0ℓ에 불과한 엔진에서 볼 수 있듯이 폭발적인 힘을 뿜어내는 고성능 차량은 아니다. 최고출력은 203마력으로, 1.6ℓ 엔진을 장착한 현대자동차의 벨로스터 터보(204마력)에도 못 미친다.
서킷에서 직접 운전대를 잡아보니 외양에 걸맞은 폭발적인 가속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 고배기량에 고출력을 자랑하는 다른 스포츠카들에 비하면 빈약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그러면서도 가격은 상당히 높다. 자동변속기 모델 기준 4690만원으로, 3.8ℓ 엔진을 얹은 현대차의 제네시스 쿠페 최상위 트림(3659만원)보다 1천만원이상 높다. 수동변속기 모델 가격은 3890만원이지만, 이 모델은 변속기 외에도 버튼시동 스마트키와 가죽시트 등 몇 개의 고급 사양이 빠져있다.
영암 서킷을 질주하고 있는 토요타 86.
직선보다 커브가 반가운 '쇼트트랙 선수'
하지만, 86은 국산 스포츠카뿐 아니라 더 비싼 가격에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다른 수입 스포츠카들이 갖지 못한 걸 지니고 있다.
이 모델은 토요타와 스바루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엔진은 스바루의 수평 대향 박서 엔진과 토요타의 직분사 시스템인 D4S 기술의 결합을 통해 제작됐다.
수평대향엔진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피스톤이 수평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피스톤이 눕혀 있는 만큼 차체에서 엔진을 낮은 곳에 배치할 수 있다는 특성을 갖는다. 그동안 수평대향엔진을 사용한 차량은 포르쉐와 스바루 밖에 없었다.
엔진의 위치가 낮으면 차체의 무게중심도 낮아진다. 이는 안정적인 주행과 코너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실제 서킷 테스트 주행에서도 코너링시마다 감탄이 터져 나왔다. 러버콘(도로에 세워 놓는 원뿔형 장애물)으로 임시로 마련한 슬라럼 코스에서는 물론, 직선 급가속 주로에서 급격히 U자로 꺾이는 헤어핀 코스에서도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보통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한 상황에서 급회전시에는 회전 반대방향으로 무게가 쏠리며 회전 방향의 바퀴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마련이지만, 86은 바닥에 단단히 달라붙은 듯 안정적이었다.
프로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차량에 동승하는 '택시 드라이브'에서는 86의 안정적인 코너링 능력이 더욱 부각됐다. 현역 레이싱 선수들의 과격한 주행에도 86은 탄탄히 버텨주는 모습이었다.
특히, 코너가 나올 때마다 드리프트 직후 급가속에도 86은 빠르게 자세를 가다듬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니셜 D에서 보던, 타이어를 옆으로 끌며 코너를 빠져나가는 장면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일반적으로 고배기량에 높은 마력수로 뛰어난 가속성능을 가진 차에 오르면 커브 구간이 썩 탐탁지 않은 장애물로 여겨진다. 속도를 줄이며 코너링에 대비하느라 가속성능을 충분히 만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86은 오히려 커브 구간이 나올 때마다 반갑다. 살짝 미끄러졌다 튕겨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웬만해서는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선 뒤에는 코너링 때마다 뒷바퀴에서 들려오는 타이어 마찰음이 전혀 위험 신호로 느껴지지 않는다.
86 개발을 담당한 타다 테츠야 수석엔지니어는 "다른 스포츠카들은 마력과 가속성능에 집중돼 있고, 가격이 비싸 보통 사람들은 도저히 구입할 수 없는, 따분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장난감"이라며, "토요타는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스포츠카를 만들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86을 개발했고, 스티어링 휠을 돌리면 원하는 자리에 정확히 반응하는, '회전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차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최고 속도로 질주하는 스피드스케이팅도 멋지지만, 코너로 파고들며 상대를 제치는 쇼트트랙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토요타가 86을 쇼트트랙 선수의 개념으로 만든 것이라면, 그 의도는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려주고 싶다. 쇼트트랙에서는 86만큼 뛰어난 선수를 찾기 힘들어 보인다.
86을 가지고 스피드스케이팅 트랙에서 그 바닥에 특화된 스포츠카들과 무리한 경쟁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시장에서의 반응도 썩 나쁘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데일리안=박영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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