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 민 “한국은 제2의 고향, 미국 오가며 연기하고 싶어”[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11.01 11:12  수정 2026.11.02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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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한국서 정체성 고민”

작품 통해 자신의 성장 과정 돌아봐

영화 ‘애프터 양’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연기했던 한국계 미국 배우 저스틴 민이 첫 한국 장편영화 ‘흐르는 여정’으로 국내 관객과 만났다. 해외에서 연기 활동을 이어온 그에게 이번 작품은 오랫동안 바라온 한국 영화 출연의 기회이자 자신의 성장 과정과 맞닿은 이야기다.


‘흐르는 여정’은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살아가던 춘희(김혜옥 분)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뜻밖의 인연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나는보리’의 김진유 감독이 연출했으며, 상실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음악과 일상의 풍경 속에 담아냈다.


저스틴 민ⓒ영화사 진진

저스틴 민은 어린 시절 독일로 입양된 뒤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한 민준을 연기했다. 친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온 민준은 이웃 주민 춘희와 가까워지고, 피아노에 재능을 지닌 소년 성찬(박대호 분)을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저스틴 민은 여러 한국 작품의 대본을 검토하던 중 ‘흐르는 여정’을 선택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작품을 해보고 싶어서 기회를 찾고 있었어요. 여러 대본을 읽었지만 마음에 와닿는 작품은 없었죠. 그러다가 ‘흐르는 여정’을 만났는데 대본을 읽자마자 감동받았어요. 민준의 이야기가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거든요. 나이가 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고민과도 맞닿아 있는 작품이었어요.”


넷플릭스 시리즈 ‘엄브렐러 아카데미’와 ‘성난 사람들’, 영화 ‘애프터 양’ 등에서 활동한 저스틴 민은 이번 작품을 한국에 보내는 러브레터에 비유했다. 영화 속 민준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가족을 찾고, 저스틴 민은 미국에서 성장한 한국계 배우로서 한국과의 관계를 이어왔다.


“민준이 한국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 저와 한국의 관계를 거울처럼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자신이 속하지 않는 낯선 곳에 왔지만,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점점 좋아하게 되잖아요. 저 역시 한국과 그런 과정을 거쳐왔어요.”


어린 시절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도 민준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저스틴 민은 형과 함께 서울 거리를 다니며 미국에서와는 다른 반응을 경험했다.


“어렸을 때 한국에 왔을 때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서울 거리를 걷는데 모든 사람이 저처럼 생겼더라고요. 미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었죠. 그렇다고 제가 한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건 아니에요. 당시 형과 영어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거든요. 그래서 나는 누구인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고민했어요. 민준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비슷한 질문을 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성인이 된 뒤에도 한국 방문은 계속됐다. 작품 활동과 개인적인 방문을 통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접할 기회가 늘었고, 어린 시절과는 다른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 자주 오면서 이제는 제2의 고향처럼 느껴져요. 한국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더 많이 알아가면서 마음도 편안해졌고,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소속감도 생겼어요. 물론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성장한 사람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어요. 제 안에는 분명 미국적인 모습이 있지만, 한국적인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스틴 민 ⓒ영화사 진진

‘흐르는 여정’에서 춘희와 민준을 연결하는 매개체는 그랜드 피아노다. 춘희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유품으로 간직해온 피아노를 민준의 집에 두면서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다. 이후 성찬까지 합류하며 서로 다른 세대의 세 인물이 음악을 통해 가까워진다.


김혜옥과 함께한 촬영은 저스틴 민에게 가족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다. 극 중 민준과 춘희는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가족과 다름없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번 영화 촬영은 제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극 중 춘희가 제 어머니는 아니지만, 민준과 춘희가 맺는 관계를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많이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미국에는 어떻게 오셨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하셨는지 돌아보게 됐죠. 제 머릿속에 있는 어머니는 여전히 40대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어느새 60대 중반이 되셨더라고요. 부모님도 영원히 곁에 계실 수는 없잖아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어떻게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영화는 춘희의 선택을 통해 존엄사 문제도 다룬다. 김진유 감독은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인물의 결정을 따라가며 타인의 고통과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질문한다. 저스틴 민은 이 소재에 관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아요. 저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아름다운 점은 관객에게 특정한 생각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그 여정을 따라갈 뿐이죠. 결국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무거운 소재와 달리 인물들의 일상에는 소소한 웃음이 녹아 있다. 민준이 막걸리를 와인잔에 담아 빨대로 마시는 장면은 저스틴 민의 제안으로 완성됐다. 한국의 전통주와 서양식 식기가 어우러진 모습은 민준의 성장 배경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막걸리를 마시는 설정 자체는 원래 대본에 있었어요. 다만 와인잔에 담아 빨대로 마시는 방식은 제가 감독님께 제안했죠.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무거울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순간에는 유머와 가벼운 분위기를 넣고 싶었어요.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섞인 모습이 민준의 정체성을 잘 상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휘자 역할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도 필요했다. 영화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은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강릉시립교향악단과 함께 촬영됐다. 실제 연주자들 앞에서 지휘해야 했던 저스틴 민은 전문 지휘자에게 별도로 지도를 받았다.


“지휘 장면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긴장됐던 장면이에요. 연습하려면 음악이 필요했는데 촬영 중에도 작곡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완성된 음악을 늦게 받았거든요. 매니저가 주말마다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전문 지휘자에게 데려다줬어요. 그렇게 지휘를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휘는 10%가 기술이고 90%는 음악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김혜옥, 박대호와의 호흡도 작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오랜 연기 경력을 지닌 김혜옥과 이번 작품으로 연기에 처음 도전한 피아니스트 박대호, 해외에서 활동해온 저스틴 민까지 세 사람의 이력은 서로 다르다.


“배우들 사이의 케미스트리는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자연스럽게 생기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죠. 이번 작품은 캐스팅이 정말 훌륭했다고 생각해요. 세 배우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했을 때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우러졌거든요. 왜 그렇게 호흡이 잘 맞았는지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마치 마법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느낌이 있었어요.”


저스틴 민 ⓒ영화사 진진

김진유 감독과는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며 작업했다. 두 사람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순간에도 장면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을 거쳤다.


“저는 감독님을 정말 좋아하지만, 감독님께서 영어를 못하시다 보니 처음에는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어요. 그런데 촬영을 거듭하면서 꼭 언어로 모든 걸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 둘 다 작품을 사랑했고,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거든요.”


저스틴 민의 필모그래피는 SF와 슈퍼히어로물, 드라마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있다. 다만 작품의 규모나 장르보다 캐릭터의 성격과 이야기에 끌리는지가 선택의 기준이다.


“저는 완벽한 인물보다는 허점도 있고 실수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요. 그런 모습이 실제 인간의 경험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사실 답하기가 어려워요. ‘흐르는 여정’처럼 대본을 읽고 감동받는 작품을 만나면 그게 바로 제가 다음에 하고 싶은 작품이 되는 거죠.”


한국 영화 출연이라는 첫 목표를 이룬 만큼 앞으로의 활동 범위도 넓히고 싶다는 바람이다. 미국을 기반으로 쌓아온 경력을 유지하면서 한국 작품에도 꾸준히 참여할 계획이다.


“한국에서 작품을 하는 건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에요. 이렇게 그 꿈을 이루게 돼서 정말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앞으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활동 비중은 한국과 미국이 50대 50인 것 같아요. 두 나라를 오가며 계속 작품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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