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위로를 그려온 12년…백미영 감독의 애니메이션 세계가 프랑스 스크린에 [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10.29 09:35  수정 2026.10.2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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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소중했던, 당신’·‘달, 어디 있니?’·‘온도’까지

“작품이 저보다 더 많은 관심 받았으면”

백미영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세 편을 묶은 ‘백조와 아이’(LE CYGNE ET L'ENFANT)가 지난 9월 16일 프랑스 극장에서 정식 개봉했다. 2013년 ‘너무 소중했던, 당신’(You Were So Precious), 2017년 ‘달, 어디 있니?’(Où est la lune ?), 2025년 ‘온도’(Ondo)까지 12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들이다. 개봉 첫 주 80개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으며, 12월까지 프랑스 전역 약 500개 극장에서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배급사 측은 내년까지 상영이 이어질 경우 총 700~800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프랑스 앙굴렘의 애니메이션 전문학교 EMCA에서 공부한 백 감독은 이후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창작 활동을 이어왔다. 2023년 다른 한국 감독의 작품과 함께 묶어 프랑스에서 개봉한 경험이 있지만, 자신의 작품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현지 극장에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은 통상 완성 후 1~2년간 영화제를 중심으로 소개되고 이후 일반 관객을 만날 기회를 모색한다. 그러나 최신작 ‘온도’는 이례적으로 영화제보다 일반 극장에서 먼저 관객을 만나게 됐다. 백 감독에게도 예상하지 못한 기회였다.


백미영 감독ⓒ본인 제공

백 감독에게 이번 개봉은 예상하지 못한 두 번째 기회이기도 하다. 2023년 첫 프랑스 개봉 당시만 해도 다시 이런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3년 만에 자신의 작품만으로 현지 관객과 만나게 되면서 기쁨도 더욱 커졌다. 백 감독은 이번 개봉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심경을 전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외였어요. 독립 애니메이션은 보통 완성 후 1~2년 동안 영화제 출품을 중심으로 선보이고, 이후 기회가 닿으면 일반 관객을 만날 방법을 모색하거든요. 이번 프로그램의 중심 작품인 ‘온도’는 지난해 완성한 최신작이에요. 영화제가 아닌 일반 극장에서, 업계 관계자가 아닌 대중에게 먼저 소개된다는 사실이 놀라웠죠. 프랑스 극장 개봉은 이번이 두 번째예요. 2023년 ‘피로피로’(Piropiro)라는 프로그램으로 한 차례 개봉한 경험이 있어요. 당시와 같은 배급사에서 ‘온도’를 보고 마음에 들어 했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번 개봉을 추진해 줬어요. 저는 그런 결정에 감사했죠. 2023년에는 제 애니메이션 네 편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민성아 감독의 작품 두 편, 총 여섯 편을 묶어 개봉했어요. 그때는 이런 기회가 제 인생에서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흔치 않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두 번째 기회를 얻었고, 이번에는 온전히 제 작품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됐어요. 솔직히 첫 번째보다 훨씬 더 기뻤어요. 첫 개봉의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프랑스 개봉은 백 감독의 작품을 눈여겨본 현지 배급사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2023년 첫 개봉을 통해 맺은 인연이 새로운 작품의 극장 배급으로 이어진 것이다.


“제 애니메이션 배급사는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프로덕션 미드랄가르(Midralgar)예요. 그런데 이번 개봉을 먼저 제안한 곳은 그쪽이 아니었어요. 유통 배급사인 시네마 퍼블릭 필름스(Cinema Public Films)에서 최신작 ‘온도’를 보고 개봉 프로그램을 기획하자고 제안했어요. 이후 미드랄가르에서 ‘온도’와 어울릴 만한 다른 작품들을 찾아 개봉에 힘을 보탰고, 그렇게 세 편이 묶이게 됐죠. 시네마 퍼블릭 필름스와는 2023년 ‘피로피로’ 개봉 당시에도 함께 일했어요. 그때 4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는데, 아마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던 것 같아요. 이후 ‘피로피로’는 프랑스 초등학교 교육 자료로도 활용될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그 덕분인지 이번에는 개봉 제안부터 실제 개봉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일 처리가 느린 편인데 이번에는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죠.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요.”


세 편의 단편이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묶인 것은 백 감독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제작 당시에는 서로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세 작품을 함께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어떨까.


“세 작품은 제작 시기도 다르고 제작 동기도 달라서 저 역시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보면서 제 작품에 이런 특징이 있구나 하고 알게 됐죠. 이번에 개봉한 세 작품의 공통점이라면 언뜻 따뜻해 보이지만 그 안에 냉정한 현실도 담겨 있다는 거예요. ‘너무 소중했던, 당신’ 속 버려진 오르골, ‘달, 어디 있니?’에서 결국 사라지는 물고기, ‘온도’에 여전히 부서진 채 놓여 있는 돌조각이 그렇죠. 다른 존재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데, 작품마다 꼭 하나씩은 어딘가 외롭고 처연하게 남겨뒀어요. 저도 왜 그런 심술을 부리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다만 애니메이션에 그려 넣은 이상적인 세계가 있더라도 현실에는 여전히 여러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완성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12년 전 완성한 ‘너무 소중했던, 당신’은 백 감독에게 창작자로서의 지난 시간을 되짚게 하는 작품이다.


“‘너무 소중했던, 당신’은 저에게 특별한 작품이에요. 제가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그림을 붙잡고 만들었거든요. 덕분에 지금도 작업하던 기억이 생생해요. 혼자서 3년 동안 2만 5000장의 그림을 그려 완성했고, 마지막으로 연필과 종이를 사용해 만든 아날로그 2D 애니메이션이기도 해요. 지금 보면 기술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당시 제 나이에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모습도 담겨 있어요. 그때는 토끼 캐릭터의 움직임을 그리는 데 깊이 빠져 있었어요. 지금 보면 이야기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꾸밈 동작까지 굉장히 많이 그려 넣었죠. 덕분에 작화량도 엄청나게 늘어났고요. 지금의 저라면 체력과 효율을 생각해서 그렇게 무모하게 작업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도 그 덕분에 시각적으로 즐거운 부분이 많이 남아 있어요. 당시의 제가 대견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오랜 제작 끝에 작품을 완성한 뒤 배급을 맡은 프로덕션에 여러 변고가 생겼어요. 담당 프로듀서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여름에는 프로덕션이 있던 마을에 큰 홍수가 나서 건물이 무너졌어요. 결국 회사가 문을 닫았죠. 작품을 완성한 지 8개월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어요. 그래서 제대로 배급하지 못했는데, 이번 ‘백조와 아이’ 개봉으로 다시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었어요. 다른 무엇보다 이 작품이 제대로 소개될 수 있게 돼 정말 기뻐요.”


ⓒ‘온도’ 스틸 ⓒCinema Public Films

최신작 ‘온도’의 출발점은 2021년 우연히 접한 해외 기사였다. 영국의 한 마을에서 백조가 품고 있던 알이 모두 깨진 뒤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사연이다.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백 감독은 이듬해 백조를 소재로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기획했다. 그러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는 4년이 걸렸다. 그 사이 개인적인 상실을 겪으면서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백조의 마음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백조에게 일어난 비극을 되돌려 애니메이션 안에서라도 다시 살려내면 어떨까 싶었죠. 백조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기획을 진행할수록 백조가 왜 죽음에 이를 만큼 절망했는지 이해되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백조에게는 다음 기회가 있었잖아요. 다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죽기까지 했을까 싶었죠. 그러다 작품을 기획한 직후 첫 임신과 초기 유산을 겪었어요. 건강이 나빠져서 한동안 작업에서 멀어졌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임신을 했는데, 그때도 몸 상태가 무척 좋지 않았어요. 임신 초기부터 출혈이 있었고, 이후 양막 일부가 손상돼 양수가 새는 증상까지 이어졌어요. 출산 직전까지 대학병원에 입원해 침대에 누워 지냈죠. 대학병원에 가기 전 다른 병원에서는 이번 임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다음 기회를 생각하라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난 아이는 이른 시기에 태어났고, 생후 두 달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고통이 길어지다 보니 어떻게든 저 자신을 추스를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백조 프로젝트를 다시 꺼내 들었고, 2024년 초에 작업을 재개했어요. 그때가 돼서야 죽음에 이르렀던 백조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백조가 그토록 좌절했던 건 그만큼 큰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거든요. 처음에는 백조를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이었다면, 그때는 백조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 된 거예요. 그러니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게 보였죠. 결국 백조가 아니라 저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다시 작업하게 됐어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작품을 완성한 뒤에는 관객의 반응을 받아들이는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전에는 작품이 어떻게 평가받을지 고민했다면, ‘온도’를 만들 때는 자신의 감정과 기억에 집중했다. 특히 세상을 떠난 아이와의 추억을 창작물로 남긴다는 사실은 백 감독에게 또 다른 의미였다.


“이번 작품은 이전과 달리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어떤 평가를 내릴지보다 저 자신을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아이와의 추억을 작품에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아픈 기억이지만 창작물로 남기면 제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기억은 계속 존재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남겨둘 수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치유가 됐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관객의 평가에도 조금 의연해졌어요.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됐죠.”


백 감독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또 다른 특징은 대사가 없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연출한 애니메이션 열 편 모두 인물의 말 대신 이미지와 움직임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러한 연출 방식에는 프랑스 유학 시절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화면에 남아 있는 연필 특유의 질감 역시 백 감독이 오랫동안 추구해 온 표현 방식이다.


“제가 연출한 작품은 모두 열 편인데, 전부 대사가 없어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첫 작품은 프랑스 유학을 가기 전 한국에서 만들었어요. 그때 대사를 넣지 않은 건 당시 학생들에게 멋있어 보였던 거장들의 작품을 따라 한 측면이 있었죠. 그런데 이후에는 언어에 대한 분노와 울분 때문에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됐어요.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 때 언어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갔거든요. 학교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었는데, 성격도 소심하고 언어도 유창하지 않으니 괜히 주눅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제가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게 무척 창피하고 화가 났죠. 사실 언어라는 게 국경 하나만 넘어가도 권위를 잃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소통 수단이라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걸까, 그게 뭐라고 나를 모자란 사람처럼 만드는 걸까 싶었어요. 그래서 언어가 없어도 더 넓고 오래 소통할 수 있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종의 반항심이었죠. 언어나 텍스트 없이 이미지만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러기 위해 화면에 캐릭터의 움직임을 더 많이 그려 넣고, 다양한 레이아웃과 장면 전환을 고민했어요. 처음에는 언어에 대한 반항심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이미지로 소통하는 방식 자체에 매료됐죠. 폭넓게 해석되고 여러 감각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예를 들어 화면에 ‘사과’라는 글자를 보여주면 사람들은 단편적인 사과 이미지를 떠올리고 끝날 수 있어요. 그런데 사과 그림을 보여주면 관객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죠. 사과의 모양이나 향, 맛을 떠올릴 수도 있고, 사과에 얽힌 누군가와의 기억이나 추억을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미지 하나로 생각의 범위가 더 넓어지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제가 만든 이미지와 관객의 특정한 감각이 만나는 지점을 즐기는 편이에요. 물론 제 방식이 지나치게 불친절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해요. 왜 감독이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관객이 여러 방향으로 해석하도록 만드느냐는 거죠. 제 방식에 호불호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게 감독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방식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 있는 한 계속 고수할 생각이에요. 그게 재미있으니까요. 연필 드로잉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부터 연필이 주는 질감에 깊이 매료돼 있었어요. 가능하다면 계속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 작업하고 싶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았어요. 별도의 작업 공간과 장비가 필요하고, 무거운 작화지도 대량으로 확보해야 하니까요. 결국 디지털 드로잉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다고 연필과 종이에 대한 향수나 집착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디지털 작업에서도 그 느낌을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하려고 여러 방법을 찾아왔어요. 지금 사용하는 디지털 브러시도 그 질감을 표현하려고 직접 제작한 거예요. 그 정도로 집착하는 부분이 있어요.”


이러한 연출 방식은 이번 프랑스 개봉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다. 대사가 없기 때문에 언어에 따른 장벽 없이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 감독은 처음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이미지 중심의 표현이 관객층을 넓히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대사가 있었다면 언어나 나이에 따라 관객이 제한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한국어로 만들었다면 프랑스에서 자막이 필요했을 테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그런데 제 작품은 이미지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줄거리도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 어린 관객도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건 아니었거든요. ‘너무 소중했던, 당신’은 대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길어진 측면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 이렇게 프랑스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은 걸 보면 당시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미지만으로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도 있어요. 대신 해석의 폭이 넓어지고 관객층도 확장될 수 있으니 어느 방식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백미영 감독 일러스ⓒ본인 제공

대사가 없는 작품에서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백 감독은 음악이 영상보다 앞서 관객의 감정을 이끄는 것을 경계한다. 색채 역시 강한 인상을 남기기보다는 절제해 사용하고, 빛을 통해 화면의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편이다.


“음악이 도움을 줘야 하는 부분이 많지만, 음악이 영상의 감정선을 앞서가지 않도록 가장 신경 써요. 작곡가가 슬픈 장면이라고 생각해 음악을 서정적으로 만들면 오히려 감정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편이에요. 음악이 주는 감정이 영상보다 깊어지면 관객의 감정을 너무 앞서가게 되니까요. ‘온도’에서도 파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작곡가와 작업했는데, 슬프게 표현한 부분을 오히려 경쾌하게 바꿔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어요. 색채도 과감하게 사용하기보다는 절제하려고 해요. 색 자체가 가진 감정이 있기 때문이죠. 대신 햇살이나 어둠 속의 은은한 달빛처럼 빛을 활용해 관객이 화면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프랑스 유학 경험은 백 감독의 표현 방식뿐 아니라 창작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낯선 환경에서 보낸 시간은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그를 이끌었다. 백 감독은 당시의 경험이 자신의 작품 세계에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돌아봤다.


“저는 유학을 시작하고 나서야 유학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교적인 편도 아니고 호기심도 적어서 해외에 있든 한국에 있든 비슷하게 행동하고 생각했을 것 같거든요. 그래도 유학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볼 시간을 가졌다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은 워낙 바쁘게 살고 경쟁하면서 지내잖아요. 그러다 보니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에 능하고 어떤 일에는 능하지 않은지 평생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고요. 저는 유학을 통해 저라는 사람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어요. 덕분에 제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죠.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지만 차츰 그런 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어요. 이렇게 태어난 이상 이렇게 살아야지 별수 있겠느냐고 생각한 거죠. 유학을 통해 바깥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눈을 갖고 싶었는데, 그건 실패한 것 같아요. 대신 제 내면을 좁고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뜻밖의 수확이었어요. 그 경험을 통해 작품도 더 깊고 단단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관객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면서도 걱정돼요. 프랑스 관객이라고 해서 한국 관객보다 더 신나는 건 아니에요. 제 작품을 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찾아온 모든 분이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라는 사람보다 제 작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여줬으면 해요. 저는 저 자신보다 제 작품이 훨씬 괜찮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프랑스에서 두 차례 극장 개봉을 경험한 백 감독은 한국과 프랑스의 독립 애니메이션 유통 환경에도 주목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것과 이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상업적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단편 애니메이션일수록 극장과 배급 시스템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작품을 만드는 건 개인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더 많은 관객에게 도달하려면 시스템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프랑스도 요즘 경제적으로 많이 어렵고, 시대가 바뀌면서 예전만큼 예술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해요. 하지만 예술의 상업적 가치와 관계없이 다양한 장르를 존중하고, 어린 시절부터 풍부한 예술 경험을 교육의 중심에 둔다는 점은 여전히 부러워요. 제가 만드는 독립 애니메이션은 한국에서 상업적으로 소비될 구조 자체가 거의 없어요. 영화제를 제외하면 일반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기가 어렵죠. 반면 프랑스에는 예술 애니메이션이나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개봉 후 수개월 동안 지역별 예술극장을 돌며 상영관 수를 누적해 나가는 시스템이 있어요. 상업적인 대형 블록버스터 중심의 영화 시장에서도 작가주의 영화, 독립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고전영화, 어린이를 위한 예술영화가 소비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둔 거죠. 덕분에 제가 만든 작은 영화도 일반 관객을 만날 수 있었고, 외국인인 저도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있어요. 물론 이런 시스템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오랫동안 쌓인 예술 소비 경험이 바탕이 됐을 거예요. 시스템 자체도 부럽지만, 단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예술에 대한 애정과 경험의 힘을 이번 기회를 통해 절실하게 느꼈어요.”


극장 배급의 어려움만큼 제작을 지속하는 일도 쉽지 않다. 백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 작업과 별개로 강의와 다른 영화의 스태프 업무 등을 병행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창작 환경이지만, 그만큼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강하다.


“단편 애니메이션은 순수 창작에 가까워요. 수익을 내기가 정말 어려운 구조라 재능 있는 감독들도 장편이나 상업적인 분야, 일러스트 등으로 옮겨가곤 하죠. 저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영화의 스태프로 일하거나 강의를 하는 등 여러 일을 병행해요. 하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은 수익이 없는 만큼 다른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즐겁기 위해 만드는 작품이니까요. 오롯이 제 결정과 창작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싶어요. 그래서 작업할 때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잘 구하지 않는 편이에요. 남편에게도 작업 중인 작품을 잘 보여주지 않아요. 누군가의 욕심을 위해 만들지 않고, 창작하는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한국 콘텐츠가 세계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는 가운데 독립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 꾸준히 작품성을 인정받아 왔지만, 상업적 성과가 크지 않다는 이유로 대중의 관심에서는 멀어져 있다. 백 감독은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이 처한 현실과 앞으로 필요한 지원에 대해서도 생각을 밝혔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떠들썩하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해외 관객을 만나왔어요. 매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영화제나 미디어 관련 행사에서도 한국 작품들은 좋은 평가를 받아왔죠. 제가 대학에 다니던 2000~2010년대만 해도 단편 애니메이션은 적은 투자로 세계 영화제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콘텐츠였어요. 어떻게 보면 가성비 좋게 애국할 수 있는 분야였던 거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만큼 대단한 성과를 내는 한국 콘텐츠가 많아졌어요. 영화와 시리즈, 음악, 게임 등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잖아요. 단편 애니메이션도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지만 다른 산업과 비교하면 경제적인 효과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같아요. 한국 애니메이션이 국내외 관객과 지속적으로 만날 방법을 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알면 참 좋겠는데 저 역시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결국 바라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아낌없이 투자해 주고, 관객들이 그런 작품을 접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통로를 마련해 줬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성과만으로 예술의 가치를 비교하지 않았으면 해요.”


경제적인 보상이 크지 않은 작업을 오랜 시간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완성의 성취감이다. 백 감독에게 애니메이션 제작은 최종 결과물을 얻는 일인 동시에 작업 과정에서 작은 만족을 쌓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혼자 처음부터 작업하다 보니 만드는 과정마다 얻는 작은 성취감이 많아요. 캐릭터를 하나 완성하면 신나고, 배경을 그리고 캐릭터와 붙여보면 또 즐거워요. 그렇게 소소한 성취들이 쌓이다가 마지막에 완성된 작품을 보면 가장 큰 보상을 얻는 느낌이에요. 어른이 되면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을 생각보다 얻기 어렵잖아요. 그런데 애니메이션은 제가 기획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런 즐거움을 계속 느낄 수 있어요. 완성하고 나면 또 다음 작품은 얼마나 재미있을까 기대하게 되죠.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오히려 부수적인 일이에요.”


12년에 걸쳐 제작한 세 작품이 프랑스 극장에서 다시 만난 가운데, 백 감독은 아직 다음 작품의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경험이 깊이 반영된 ‘온도’를 완성한 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직 차기작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온도’는 무거운 마음으로 만들었던 작품인 만큼 다음에는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저에게 찾아왔으면 좋겠어요. 아마 또 동물의 이야기가 될 것 같기는 해요. 최근에도 새와 관련한 소재에 관심이 생겨 국내 조류 연구자에게 직접 문의해 봤어요. 아직은 구상 단계라 구체적으로 정해진 건 없어요. 주변 동료들은 또 새를 그리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사실 저도 의식하고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동물에 관한 기사나 영상을 접하다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거든요.”


백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품에 담긴 의미를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일이 아니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감정을 발견하고, 상영이 끝난 뒤에도 작품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처음 자신의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관객에게도 같은 마음이다.


“제 애니메이션이 관객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내세우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작품을 본 뒤에도 가끔 자신의 기억이나 감정과 나란히 놓고 다시 떠올려볼 수 있는 장면이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오래 곱씹을 수 있는, 다정한 작품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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