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베를린이 주목한 일본 창작집단…협업에서 스튜디오로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10.26 14:00  수정 2026.10.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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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 레이블, 넷플릭스·카카오와 협력…나띵 뉴는 베를린서 성과

영화감독과 각본가 등 창작자들이 모여 작품을 만드는 방식은 낯설지 않다. 서로의 작품에 참여하거나 공동으로 기획을 개발하는 협업은 독립영화 현장에서 꾸준히 이어져 왔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러한 창작자 중심 조직이 상업영화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리즈를 제작하고 글로벌 플랫폼과 협력하는 등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개별 창작자들의 협업이 지속적인 콘텐츠 제작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사례는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 등이 참여한 콘텐츠 스튜디오 ‘바벨 레이블’이다. 2013년 설립된 바벨 레이블은 일본 사이버에이전트 계열의 제작사로, 여러 감독과 각본가들이 소속돼 영화와 드라마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신문기자’, ‘정체’ 등을 연출한 후지이 감독을 비롯해 하라 히로토, 마쓰모토 유사쿠, 야마구치 겐토 등 다양한 창작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사내독립기업(CIC) 장세정(왼쪽) 대표와 바벨 레이블 후지이 미치히토 감독ⓒ카카오엔터

바벨 레이블은 후지이 감독의 작품 활동을 기반으로 인지도를 높였지만, 특정 감독의 영화만 제작하는 조직은 아니다. 감독과 각본가들이 참여하는 제작 체계를 갖추고 영화와 드라마로 영역을 확장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이쿠사가미’ 역시 이러한 제작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각본 개발도 조직적으로 이뤄진다. 바벨 레이블은 각본가 조직 ‘Writers' room’을 통해 여러 창작자가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신진 창작자를 위한 레이블 ‘2045’도 출범시키며 새로운 인력의 발굴과 육성에 나섰다. 기존 감독들의 개별 활동을 넘어 새로운 작품과 창작자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시도다.


해외 기업과의 협력도 활발하다. 바벨 레이블은 2023년 넷플릭스와 5년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넷플릭스는 이 기간 바벨 레이블이 제작·개발하는 여러 작품에 대한 독점적 접근권을 확보하고, 양측은 영화와 시리즈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지난해 2월에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파트너십을 맺었다. 양사는 영화와 드라마를 공동 개발하고 웹툰·웹소설 등 지식재산권(IP)의 영상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첫 협력 프로젝트에는 후지이 감독이 연출자로 참여할 예정이다. 창작자들이 모여 활동하던 조직이 글로벌 플랫폼과 해외 콘텐츠 기업의 제작 파트너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본의 창작자 중심 조직들이 모두 바벨 레이블과 같은 사업 모델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장르영화에 집중하거나 공동 창작을 통해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하는 사례도 있다.


'애니마트'·'재앙재' 스틸ⓒ나띵 뉴 ·오월

2022년 설립된 제작사 ‘나띵 뉴’(NOTHING NEW)는 1993년생 하야시 겐타로 대표가 이끌고 있다. 공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신진 창작자들의 작품을 기획·제작하는 회사다. 여러 감독의 작품을 묶은 호러 단편집 ‘NN4444’를 선보이며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최근에는 장편영화로 제작 영역을 넓혔다. 이와사키 유스케 감독의 첫 장편 ‘애니 마트’(AnyMart)는 편의점을 배경으로 한 호러 코미디로, 올해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받았다. 신진 감독의 장르영화를 기획·제작해 국제영화제에서 성과를 거둔 사례다.


창작집단 ‘오월’(5月)은 공동 연출과 형식 실험에 무게를 둔다. 2020년 출범한 오월은 세키 도모타로, 히라세 겐타로 등이 참여하는 감독 집단이다. 앞서 단편영화 ‘핫포엔’, ‘도치라오’ 등으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으며, 장편 ‘미야마쓰와 야마시타’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일본 WOWOW에서 방영된 드라마 '재앙 재'를 극장판으로 다시 만들었다. '재앙 재'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일상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오월은 같은 세계관을 드라마와 영화라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 풀어냈고, 극장판에서는 세키 도모타로와 히라세 겐타로가 각본·연출·편집을 함께 맡았다. 히라세 겐타로는 영화 ‘8번 출구'의 각본에도 참여했다.

이

작품은 국내 관객과도 만난다. 김태호 PD가 이끄는 제작사 테오(TEO)가 배급사 워터홀컴퍼니와 함께 꾸린 영화 배급 라인업에 '재앙 재'가 이름을 올렸다.


바벨 레이블이 상업영화와 OTT, 해외 공동 제작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면 나띵 뉴는 장르 콘텐츠를 중심으로 신진 감독을 발굴하고 있다. 오월은 공동 창작과 형식 실험을 통해 작품을 선보인다. 규모와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여러 창작자의 역량을 결합해 지속적으로 작품을 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에서도 창작자들이 모여 독자적인 제작 환경을 구축한 사례가 있다. 광화문시네마는 김태곤, 우문기, 이요섭, 전고운 등 감독과 제작 인력이 서로의 작품에 참여하며 활동한 독립영화 제작사다.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 ‘소공녀’ 등을 선보였다. 감독들이 각자의 작품을 만들면서도 기획과 제작 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나누는 방식으로 협업을 이어왔다.


구교환과 이옥섭의 공동 창작 브랜드 ‘2X9HD’도 있다. 두 사람은 여러 단편영화를 함께 제작하며 자신들만의 작업 방식을 구축했고, 장편 ‘메기’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각본과 연출, 연기 등 다양한 역할을 나눠 맡으며 공동 작업을 지속해 왔다.


최근에는 여러 감독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식도 시도됐다. 지난 2월 개봉한 옴니버스 공포영화 ‘귀신 부르는 앱: 영’은 형슬우, 고희섭, 이상민, 서종훈, 손민준, 김승태 등 여섯 감독이 참여한 작품이다.


형슬우 감독은 제작사와 협의해 단편영화 작업에서 눈여겨봤던 감독들을 모았다. 각자의 연출 역량을 결합해 하나의 옴니버스 영화를 완성하자는 취지였다.


영화는 약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형 감독에 따르면 저예산으로 제작됐지만 수익을 거뒀으며, 참여 감독들 사이에서는 후속 협업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는 "감독들이 이 세계관으로 계속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협업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귀신 부르는 앱: 영’은 여러 감독이 하나의 작품을 위해 모인 프로젝트형 협업이라는 점에서 광화문시네마나 바벨 레이블처럼 지속적인 제작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도 창작자들의 공동 작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를 기반으로 상업영화와 OTT 시리즈를 제작하고 해외 기업과 협력하는 조직은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창작자들의 협업이 개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서 나아가 지속 가능한 제작 기반과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국내에서도 창작자 연대의 잠재력이 입증된 만큼, 이를 체계화하고 확장하기 위한 제작 생태계의 고민과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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