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에게 화났다더니 왜 동네 약국을…프랑스 시위의 모순 [기자수첩-국제]

정인균 기자 (Ingyun@dailian.co.kr)

입력 2026.10.22 07:00  수정 2026.10.2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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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매장부터 동네 약국까지…약탈 피해 확산

고물가 항의하다 서민 생계 위협…상인들 분통

혁명 외쳤지만 남은 건 폐허…시위 명분 퇴색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검은색 옷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이 상점 내부의 물품을 상자에 담아 옮기고 있다. ⓒAFP 홈페이지 캡처

프랑스 파리의 명품 거리는 지난 주말 아수라장이 됐다. 시위대 일부가 셀린느와 샤넬 매장의 유리창을 부수고 상품을 쓸어갔다. 명품 매장만 공격받은 것은 아니었다. 동네 약국과 미용실, 만화 전문점까지 털렸다. 부자들에게 화가 났다면서 정작 동네 약국의 온수기까지 뜯어간 것이다.


지난 17일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주최 측 추산 80만 명이 참여했다. 고물가와 교육 환경 악화,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거리에는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가 울려 퍼졌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고 상점 약탈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최소 3000개 상점이 파손되거나 약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샤넬은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영업을 재개하면 그만일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 매출로 임대료와 직원 월급을 감당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가게 하나가 무너지면 생계가 흔들린다. 프랑스 현지 언론들이 폭동 이후 주목한 것도 이런 소상공인들의 목소리였다.


파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오델리아는 불에 탄 가게를 바라보며 재고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약탈자들은 의약품뿐 아니라 온수기와 조명까지 뜯어갔다. 약국 위층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건물에 어떻게 불을 지를 수 있느냐며 고물가에 항의하는 방식이 이것이냐고 되물었다.


파리 마젠타 대로에서 12년 동안 미용실을 운영한 말렌의 사정도 비슷하다. 그의 가게에서는 화장품과 커피머신, 계산대까지 사라졌다. 아내는 깨진 거울과 뒤집힌 의자 사이에서 눈물을 흘렸다. 말렌이 다음 약탈에 대비해 마련한 것은 거창한 보안시설이 아니라 출입문을 막을 접착테이프였다.


볼테르 대로의 만화 전문점 직원 앙투안은 더 끔찍한 일을 겪었다. 가게 위층에 살던 그는 야구방망이를 든 복면 괴한들이 자신의 일터를 부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촬영하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들었다. 경찰관 한 명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4시간 동안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세 사람의 가게에서 사라진 물건들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약국의 온수기와 미용실의 커피머신, 만화책이 정부의 긴축정책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물가를 낮추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정작 이웃의 생계를 위협한 셈이다.


물론 프랑스에서 거리의 저항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부터 1968년 5월 혁명, 2018년 노란 조끼 운동까지 시민들은 거리에서 정치적 변화를 요구했다. 이번에도 일부 시위대는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과 동네 미용실의 계산대를 훔치는 일을 같은 저항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이득을 챙길 가능성이 있는 쪽은 따로 있다. 강력한 치안 정책을 내세워 온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의원과 극우 진영이다. 이들은 정부가 시민의 안전조차 지키지 못한다며 공세를 펼칠 수 있다. 반면 급진좌파는 시위의 배경인 경제적 불만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리의 폭력이 거세질수록 고물가와 교육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치안 문제가 정치권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수 있다.


프랑스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두고 또다시 책임 공방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치안 강화를 약속하고, 극우는 더 강력한 공권력을 요구하며, 좌파는 시위의 원인이 된 경제 문제를 해결하라고 압박한다. 각자의 주장은 다르지만 정작 거리에서 벌어진 일은 정치권의 익숙한 논쟁에 가려지고 있다. 시위가 끝나면 정치인들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겠지만, 가게를 잃은 상인들은 다음 날 장사부터 걱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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