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세계를 품다①] 런던으로 간 인왕산…국보로 펼치는 한국 미술 2000년

임채현 기자 (hyun0796@dailian.co.kr)

입력 2026.10.01 10:45  수정 2026.10.0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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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시카고 이어 유럽 첫 전시…英박물관 42년 만의 대규모 韓미술전

국보 10건·보물 13건 등 100건…개인 소장품서 세계와 나누는 문화유산으로

영국 런던 도심 피카딜리 전광판에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삼성

비에 젖은 인왕산의 짙은 바위와 그 사이를 흐르는 안개. 겸재 정선이 화폭에 담은 서울의 풍경 '인왕제색도'가 런던으로 갔다. 고려청자와 조선 회화, 이중섭의 그림도 함께다. 한 수집가가 평생 모은 작품들이 이제 한국의 오랜 역사와 예술을 세계에 보여주는 문화자산이 됐다.


1일부터 내년 1월31일까지 영국 런던에 위치한 영국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한국: 2000년 창의의 여정(Korea: 2,000 years of Creativity)'은 이건희 컬렉션의 유럽 첫 전시다. 지난해 미국 워싱턴D.C.와 올해 시카고에 이은 세 번째 해외 순회전이다. 영국박물관에서의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 개최는 1984년 이후 처음이다.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현지시간)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등 유족들이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갈라 디너에 참석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저희 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예술과 문화는 보존하고 함께 나눠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며 "이번 전시가 2000년에 걸친 한국의 창의성과 문화유산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앤 공주, 앤 공주의 남편 티머시 로런스 경이 KH컬렉션 순회전을 둘러보고 있다.ⓒ삼성
2만3000점 기증 5년…개인 소장품에서 국가 문화자산으로

이건희 컬렉션의 뿌리는 삼성가가 두 세대에 걸쳐 이어온 문화재 수집에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우리 문화유산을 가꾸고 후대에 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미술품을 수집했고, 이 선대회장이 이를 이어 고미술부터 근현대 미술까지 수집의 폭을 넓혔다. 홍 명예관장도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컬렉션 구축에 힘을 보탰다.


전환점은 2021년이었다. 이 선대회장 유족은 고인이 수집한 미술품과 문화유산 2만3000여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국보와 보물을 비롯한 고미술부터 김환기·박수근·이중섭 등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까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대규모 기증이었다.


기증 이후 작품의 역할도 달라졌다. 개인의 수장고를 떠난 작품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보존·연구되고 국내 전시와 지역 순회전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됐다. 지난해부터는 해외로 무대를 넓혔다. 첫 해외 순회전은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시작됐다.


약 8만명이 전시를 찾았다. 올해 3월부터 7월까지 시카고미술관에서 이어진 두 번째 전시에는 약 11만5000명이 방문했다. 미국 두 도시에서만 약 19만5000명이 이건희 컬렉션을 관람했다. 워싱턴D.C.와 시카고를 거쳐 도착한 세 번째 무대가 런던이다. 개인이 평생 모은 컬렉션이 국가에 기증되고, 공공기관의 보존과 연구를 거쳐 해외 관람객에게까지 공개되는 과정이 본격화된 것이다.


지난 1월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삼성
지난 1월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삼성
국보 10건·보물 13건…한국 미술 2000년을 한자리에

이번 런던 전시에는 총 100건의 작품이 출품된다. 국보 10건과 보물 13건이 포함됐다. 작품의 시간적 범위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현대까지 약 2300년에 이른다. 고대 금속공예와 불교미술, 고려청자, 조선 회화·공예, 근현대 미술이 시대를 잇는다. 서로 다른 시대와 쓰임, 재료의 작품을 통해 한국인이 무엇을 만들고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구성이다.


대표작은 정선의 '인왕제색도'다. 영국박물관은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정선이 관념 속 이상적인 풍경 대신 실제 한양의 인왕산을 그렸다는 점에 주목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서울의 풍경이 해외 관람객에게는 한국 회화의 변화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김홍도의 '추성부도'와 백남순의 '낙원'도 미국에 이어 런던에서 선보인다. 반면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과 전(傳) 덕산 청동방울 일괄, '까치와 호랑이', 이중섭의 '묶인 사람들' 등은 미국 순회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미국 전시를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런던에서 새로운 작품을 더해 한국 미술의 폭을 넓혔다.


영국박물관이 주목하는 것은 한국 미술의 독창성뿐만 아니라 교류와 변화다. 박물관은 공식 전시 소개에서 한국의 예술가와 장인들이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만들어 왔다고 설명한다. 고려청자의 기술과 장식, 조선 백자의 절제된 아름다움 등 시대에 따라 변화한 미감도 함께 조명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9월 30일(현지시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KH컬렉션 순회전 갈라 디너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삼성
42년 만의 특별전…한국 미술과 이어온 인연

영국박물관이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을 여는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당시 '한국의 보물: 5000년의 미술'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했다. 전시는 이후 독일 쾰른과 함부르크로 이어지며 유럽에 한국 미술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42년 동안 한국 미술과의 접점이 끊긴 것은 아니다. 영국박물관은 2000년 상설 한국관을 개관했고, 201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지원을 받아 전시 공간을 새롭게 단장했다. 도자기와 회화, 금속공예, 칠기 등 한국 문화유산을 상설 전시하며 교류를 이어왔다. 이번 특별전은 그간 축적된 교류 위에서 한국 미술의 범위를 고대에서 현대까지 확장해 한자리에서 조명한다. 영국박물관은 전시에 맞춰 한국 미술 2000여 년을 다룬 공식 도록도 선보인다.


무대가 지닌 상징성도 크다. 로제타석과 파르테논 신전 조각 등 세계 각지의 문화유산을 소장한 영국박물관은 서로 다른 문명의 역사와 문화를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한국 미술을 대규모로 소개한다는 것은 개별 국보와 명작을 알리는 데서 나아가 한국의 역사와 미감을 세계 문화의 흐름 속에서 소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워싱턴D.C.와 시카고를 거쳐 런던에 도착한 이건희 컬렉션은 이제 세계 관람객에게 한국 미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21년 국가에 기증된 작품들이 국내를 넘어 세계 주요 박물관으로 무대를 넓히면서 이 회장이 강조한 '보존과 나눔'도 이어지고 있다. 영국박물관에서는 내년 1월까지 한국 미술 2000년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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