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서 계급, 창작의 윤리까지…이창동 ‘가능한 사랑’의 질문들 [볼 만해?}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9.23 08:30  수정 2026.09.2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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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한국 대표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출품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율을 자막으로 띄우며 시작한다. 영화는 해고 노동자 부부와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를 만나게 한 뒤, 서로의 삶에 가까워지는 네 사람을 따라간다. 처음에는 낯설게 놓였던 이 계율은 이들의 관계가 얽힐수록 조금씩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 분)는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 분)과 그의 아내 미옥(전도연 분)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다. 호석은 2009년 쌍용자동차 사태를 연상시키는 ‘SP중공업 사건’의 해고 노동자로, 파업과 강제 진압을 겪은 뒤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지와 그의 남편이자 자본가인 상우(조인성 분)가 이 부부와 얽히면서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네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가능한 사랑' 스틸 ⓒ넷플릭스

예지가 노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뒤늦은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과거 상우와 함께 머문 어느 쾌적한 공간에 감탄했던 그는 그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편리하고 아름다운 일상 뒤에는 늘 노동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존재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세탁소를 운영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익숙했던 노동의 풍경마저 사라지고 있다고 느낀 예지는 카메라를 든다.


그러나 영화는 예지의 관심을 순수한 선의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노동자를 찾아다니던 그는 정작 자신의 별장에서 요리하고 정원을 돌보는 ‘보이지 않는 손들’에는 무감각하다. 이를 정면으로 찌르는 사람은 오히려 상우다. 그는 아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척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냉소적이지만 적어도 상우는 자신과 호석 가족 사이에 놓인 거리를 알고 있다.


그렇다고 예지의 마음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그는 진심으로 호석과 미옥을 이해하고 가까워지려 한다. 오히려 그 진심 때문에 예지라는 인물은 더 묘한 불편함을 남긴다. 타인의 삶에 다가가려 애쓰면서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그곳에서 비롯된 특권은 미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옥이 새로 일하게 된 마스크 공장에서 예지가 노동조합 결성을 독려하는 장면은 이런 불편함을 키운다. 카메라는 현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고 싶은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호석과 미옥에게 삶인 것이 예지에게는 작품이 된다.


이 질문이 가장 날카로워지는 곳은 별장이다.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카메라 앞에 털어놓은 날 새벽, 호석은 홀로 밖으로 나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오랫동안 눌러온 고통을 터뜨린다. 미옥은 멀리서 남편을 바라본다. 다가가지도, 달래지도 못한 채 그저 지켜본다.


돌아서려는 순간 미옥의 눈에 카메라를 든 예지가 들어온다. 같은 호석을 바라보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그 광경의 의미는 같지 않다. 미옥에게는 함께 견뎌온 남편의 고통이지만 예지에게는 특별한 그림이다.


다음 날 미옥은 상우에게 바다로 가자고 한다. 그곳에서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는 미옥이다. 당황한 상우가 뒤따라 들어가 손을 뻗지만 미옥은 잡혀주지 않는다.


바닷가 장면은 그동안 이어져 온 두 부부의 관계가 처음으로 뒤집히는 장면처럼 보인다. 먼저 옷을 벗고 물에 들어가며, 상우가 손을 뻗어도 잡혀주지 않는다. 처음으로 관계의 주도권이 미옥에게 넘어간다.


상우가 가진 돈은 친절과 다정을 베풀 수 있는 여유까지 제공한다. 원하는 사업 역시 손에 넣는다. 그러나 그가 원한다고 해서 미옥까지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우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미옥의 몸은 그래서 영화 첫머리의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율과도 겹쳐진다.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상우가 갖지 못하는 것이 있고, 가장 가진 것이 적은 미옥이 자신의 몸과 의지만큼은 내어주지 않는다.


'가능한 사랑' 스틸 ⓒ넷플릭스

영화가 보여주는 계급의 차이는 이처럼 돈의 액수보다 관계 속에서 반복된다. 별장 관리인 민식은 상우의 어린 시절 친구지만 이제는 상우가 호루라기를 불면 달려오는 사람이다. 상우의 친절과 여유 뒤에도 이 수직적인 질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호석은 이미 노동과 함께 자신의 일부를 잃은 사람이다. 옥쇄 파업 초반만 해도 동료들과 천막을 치고 투쟁한다. 언젠가는 일터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쓰러진 그의 눈앞에서 동료들은 자신을 두고 썰물처럼 흩어진다. 회사에 대한 분노보다 믿음이 무너진 기억은 오랫동안 호석을 붙잡는다.


그 시간은 다음 세대의 풍경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호석과 미옥의 아들 철은 집 안에 오래 쌓인 긴장과 불안 속에서 점차 말수가 줄고 자신의 안으로 움츠러든다. 영화는 철의 성향을 부모가 겪은 상처와 직접 연결하지 않지만, 호석에게서 끝나지 않은 삶의 무게가 아들의 일상에도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별장에서 철이 관리인 민식의 지도를 받으며 정원에 물을 주는 모습을 바라보는 미옥의 표정은 그래서 복잡하다. 호석과 미옥이 노동으로 삶을 꾸려왔듯 아들의 미래 역시 이미 정해진 자리를 따라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계급의 차이가 다음 세대의 가능성까지 좁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이 겹쳐 보인다.


영화에서 거듭 언급되는 AI 역시 노동이라는 질문을 현재로 끌어온다. 인간의 노동이 빠르게 대체되는 시대, 노동으로 자신을 설명해온 호석 같은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 영화는 SP중공업에서 밀려난 한 노동자의 과거와 노동 자체가 사라질지 모르는 미래를 나란히 놓을 뿐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가능한 사랑’을 두고 “어떻게 보면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 같고, 어떻게 보면 계급 갈등 이야기 같고, 어떻게 보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 같고, 어떻게 보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이야기 같다”고 말했다. 영화 역시 어느 하나를 정답으로 고르지 않는다. 노동과 계급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로 번져간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 끝에는 '가능한 사랑'이 있다. 20대의 호석과 미옥은 월미도에서 오랫동안 말없이 달을 바라본 적이 있다. 아마 그 때 두 사람은 서로가 평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않았을까. 여전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호석 옆에 같이 술잔을 기울여주는 미옥. 그리고 두 사람은 여전히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다. 달은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남아 있는 어떤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23일 극장 개봉 후 11월 6일 넷플릭스 공개. 러닝타임 16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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