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작품도 있다…2025 드라마가 비춘 현실 [드라마 속 직업, 현실의 2030③]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1.03 14:01  수정 2026.01.03 14:01

2025년 드라마 흥행 기준의 한 축은 전문직·부자들의 이야기로, 현실과는 다른 2030의 시간을 보여주는 변호사·의사·재벌·대기업 사람들의 삶이 편성표를 채웠다. 그럼에도 현실의 2030이 겪는 고민을 보여주려는 시도 역시 꾸준히 이어졌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적 스토리 안에서 그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다른 세대가 이를 이해할 여지를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tvN

박보영이 1인 2역을 연기해 화제가 된 tvN '미지의 서울'은 같은 얼굴을 한 일란성 쌍둥이 유미지와 유미래가 서로의 삶을 맞바꾸는 설정으로, 이제 막 30대가 돼 방황하는 이들이 서 있는 좌표를 보여준다. 미래는 서울의 금융공기업 한국금융관리공사 기획전략팀 선임, 미지는 고향 두손리에서 할머니를 돌보며 농번기 일용직·마트 알바·택배 상하차를 전전해 온 인물이다. 언뜻 보면 신분 체인지 판타지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드라마가 집중하는 건 2030이 현실을 살며 겪는 이들이 진짜 원하는 속도와 무게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미래는 금융공기업에 다니는 성공한 인생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말단 직원이다. 미지도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과거 꿈을 잃고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연습을 하는 인물이다. 한국은 2003년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1위를 기록해 왔고 아직도 우울증과 정신과 치료를 밝히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지와 미래의 아픔은 많은 청춘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살아보는 동안 시청자들은 그들이 감당해 온 불안한 감정선을 따라가며 '같은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안도감, 위로와 힐링을 받게 되고 최고 시청률 8.4%를 기록하는 등 호평을 얻었다.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통신 대기업 ACT영업부 25년 차 부장 김낙수(류승룡 분)가 회사의 구조조정과 희망퇴직 바람 속에서 자신이 안정적이라고 믿어온 세계가 생각보다 허약하게 무너진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공장 발령, 본사 복귀 무산, 예상보다 적은 퇴직금, 실패한 재취업 시도까지 거치면서 불안을 떠안게 된다.


퇴직 후 가족관계·친구 관계가 달라지는 모습 등을 통해 이 작품은 한국 사회가 말해 온 정답의 인생을 꽤 집요하게 비틀어 보여준다. 회사에서 나오는 순간 김낙수는 집에서는 하루 종일 눈치 보는 가장, 친구들 모임에서는 실직 사실을 숨기고 농담으로 버티는 중년 남성일 뿐이다. 대기업 명함이 사라지자 아내와의 호칭도, 자녀와의 대화 방식도, 친구들과의 위계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드라마는 한국식 성공으로 통하던 서울 자가, 대기업 정규직, 부장 타이틀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조건 위에 세워져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30에게 이 이야기가 역설적인 위로가 되는 건 바로 그 지점 때문이다. 대기업 들어가서 승진만 잘하면 인생이 해결된다는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도 언젠가는 구조조정과 희망퇴직, 건강 문제, 가족 변화 앞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 속 김낙수는 퇴사 이후 세차·카센터 사업을 기웃거리며 방황하지만 결국에는 직함이 아니라 김낙수라는 이름으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지를 다시 묻기 시작한다. 정석 루트를 타지 못한 2030에게 "그래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건네는 작품이다.



ⓒtvN

올해 tvN의 마지막 토일드라마 '프로보노'는 출세에만 관심 있던 판사 강다윗(정경호 분)이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법원을 떠나 대형 로펌 구석방 공익팀 프로보노에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다른 변호사 드라마와 다른 지점은 시청자가 일상에서 쉽게 내뱉는 말과 태도를 그대로 끌고 들어와 문제 삼는다는 점이다.


초반부에서 강다윗은 동료 변호사 박기쁨(소주연 분)의 말투와 손짓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슬려한다. 그러나 이후 박기쁨의 부모가 청각장애인이라 어릴 적부터 수어로 대화하며 자라 손을 크게 움직이는 습관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시청자에게도 불편함을 느꼈던 타인의 몸짓과 말투 뒤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 있냐는 질문을 던지며 젠더·이념·사회적 약자까지 모든 문제에서 '혐오의 시대'라 불리는 요즘의 사회상을 꼬집는다.


일회성 자극만을 쫓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기존 법정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웠던 반려견 전기 충격 짖음방지 목걸이 문제 등 사소해 보이고 관심도는 낮지만 돌아봐야 할 지점을 에피소드로 끌어온다. 강다윗은 처음엔 "개 좀 조용히 시키라고 만든 건데 뭘 그렇게까지"라며 의뢰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직접 목걸이를 차고 전기 충격을 경험해 본 뒤에야 동물 학대의 고통을 몸으로 겪고 사건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드라마는 강다윗의 입을 빌려 요즘 사람들의 인식을 거의 날것 그대로 끌어온다. "난민? 지금은 청년 실업이 더 문제야", "장애인 기본권? 출근길 지하철 막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같은 대사는 SNS와 댓글창에서 흔히 보이는 말투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자신도 불안정한 위치에 있으면서 정작 더 취약한 집단에게 분노를 돌리는 이른바 '을끼리의 전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시민들끼리 서로를 돕기는커녕 서로를 헐뜯고 그 과정에서 가장 약한 존재들을 다시 한 번 밀어내는 구조가 얼마나 문제인지 보여준다.


이밖에도 노무사 노무진(정경호 분)이 노동 현장에서 죽거나 다친 이들의 '사후 의뢰'를 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코믹 판타지 장르를 통해 실습생 사망, 태움 문화, 위장도급·불법파견, 플랫폼 노동자의 산재 문제 등 현실에서 반복돼 온 사건들을 그대로 끌어와 정면에서 다루는 MBC '노무사 노무진'과, 딸의 생활비와 등록금을 책임지는 건설 현장 소장 싱글맘과 암 진단을 받고 삶의 의지를 잃은 의대생 딸이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tvN '첫, 사랑을 위하여' 등은 안정된 직업을 목표로 달려왔지만 번아웃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물들을 그리며 드라마 속에서 단순한 성공 목표처럼 소비돼 온 전문직 서사의 이면을 드러낸다.


상류층·전문직 서사만 반복되는 드라마 시장 속에서 이런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작은 균열이야말로 2030 시청자가 현실과 드라마 사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몇 안 되는 지점이자 다양한 얼굴의 청춘을 보여주려는 드라마들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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