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의 위기를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부재'다. 흥행작의 부재, 투자 여력의 부재, 그리고 기대감의 부재. 그러나 독립영화 '여름이 지나가면'을 본 후, 이 진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촘촘한 연출과 동시대적 감각을 품은 이 영화는, 현재의 한국영화가 끝났다고 말하기엔 너무 또렷한 생기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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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말처럼 올해 극장가는 유난히 조용했다. 대목이라 불리던 시기에도 흥행을 단정 지을 작품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한 해를 정리하는 시점까지도 ‘천만’이라는 숫자는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투자가 위축된 사이 고예산 영화는 자취를 감췄고, 한국 영화는 중간 규모 작품들로 겨우 흐름을 이어갔다. 반면 연말 극장의 중심은 다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차지했다.
31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올해 극장을 찾은 누적 관객 수는 1억548만2749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극장 운영이 위축됐던 2020년과 2021년을 제외하면, 2004년(6923만7708명) 이후 두 번째로 낮은 수치다. 숫자만 놓고 보면 회복의 기미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억 명을 넘기기 힘들 것 같은 한숨이 이어졌지만 '주토피아2', '아바타: 불과 재'로 간신히 해가 바뀌기 전 1억 명을 넘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장은 점점 안전한 선택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흥행이 보장된 프랜차이즈, 이미 성과가 검증된 브랜드, 해외 블록버스터 중심의 편성이 반복된다. 위험을 감수할 여력이 줄어든 산업 구조 안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 결과, 새로운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 와중에 균열을 낸 건 독립영화들이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누적 관객 18만 명으로 손익분기점 8만 명을 훌쩍 넘겼다. 2019년 독립영화 흥행의 상징이었던 '벌새'의 기록(15만 명)의 기록도 깼다. 독립영화 기준 이례적인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성공이 산업의 계산법과는 다른 궤도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투자도, 공격적인 마케팅도 없었다.
다만 이 같은 성과를 독립영화 전반의 흥행 회복으로 확대 해석하기는 어렵다. 올해 독립·예술영화 시장에서 이만한 관객 수를 기록한 작품은 사실상 '세계의 주인'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11만 명)이 유일하다. 흥행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흐름이라기보다 예외에 가깝다.
그럼에도 '세계의 주인'이 던진 신호는 단순한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독립영화 현장에는 분명한 변화의 기류가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와 감각 면에서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 한지수 감독의 '맨홀', 엄하늘 감독의 '너와 나의 5분'은 개인적으로 올해 극장에서 만나 반가웠던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을 보며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분명했다. 제작 규모나 산업적 조건과 상관없이, 좋은 이야기와 정직한 연출만으로도 관객과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작품들이 모두 젊은 감독들의 첫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과장된 설정이나 유행하는 공식을 따르기보다, 동시대의 감정과 관계를 차분히 포착하는 방식으로도 관객과 충분히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또렷하게 보여줬다.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 현장에는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드는 영화인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영화들을 놓치고 있었는지, 그리고 초심으로 돌아가 정직한 정공법으로 관객과 다시 만날 방법이 무엇인지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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