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에서 한글자막이 수행하는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자막은 대사 전달을 돕는 보조 수단을 넘어, 달라진 관객의 청취 환경과 반복되는 '대사 불만' 요구를 반영하여 작품의 이해도를 높이는 관객 친화적 연출 장치로 확장되는 중이다.
감독으로 나선 하정우는 신작 '윗집 사람들'의 대사에 전체 자막 삽입을 결정했다. 이 영화는 아랫집과 윗집 부부 네 사람이라는 단조로운 구성을 한 치의 여백 없이 꽉 채우는 것이 네 사람의 대사인 만큼, 관객이 이 대사의 밀도 높은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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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적 세계관과 문어체 대사, 그리고 한국 영화에서 꾸준히 제기되어 온 "대사가 잘 안 들린다"는 관객의 피드백을 정면으로 수용한 선택이기도 하다.
하정우는 "단어 하나까지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전체 자막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대사 이해를 돕는 가장 확실하고 친절한 보조 장치인 동시에, 네 인물의 심리와 극의 긴장감을 오롯이 전달하는 핵심적인 연출 장치로 기능하게 된 변화다.
이러한 흐름은 이미 주목할 만한 상업 영화들의 선택에서 감지되어 왔다. 2022년 류승완 감독이 '모가디슈'에서 북한 인물의 낯선 억양과 단어 사용이 관객의 청취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일부 자막 처리를 선택했고, 2023년 개봉한 '밀수'는 아예 한글 자막 버전을 동시에 선보이며 대사뿐 아니라 중요한 행동 지문과 배경음까지 자막으로 표기했다.
특히 '밀수'는 장애인을 위한 배리어프리 버전이 아닌,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자막을 확대 적용했다는 점에서 '청취 환경 개선'이 영화 제작의 보편적인 고려 사항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도 자막의 필요성을 입증한다. 1편인 '명량'에서 소음이 많은 전투 장면에 소리가 잘 안 들린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김 감독은 2편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전투 장면에 한해 자막을 넣었고, 3편 '노량'에는 영화 전체에 자막을 설정했다.
이는 자막이 관객의 이해도를 보완하는 기능을 기본으로 두면서, 복잡한 음향 환경 속에서도 정보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관객 친화적 선택'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잘 들리게 만드는 것이 곧 감독의 연출 의도를 지키는 일이 된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급격히 달라진 감상 환경이 있으며, 이는 자막의 활용 방식을 재편하고 있다. OTT 시대 이후 자막을 켠 채 시청하는 방식이 기본값이 되었고, 대중교통 시청, 집안일과 병행하는 멀티태스킹 감상 등이 일상화되면서 자막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환경에서 정보를 빠르게 이해하는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감독들 역시 이러한 변화를 의식하고, 관객이 어떤 환경에서 시청하든 작품의 중요한 의미를 놓치지 않도록 자막을 대사 전달의 핵심 통로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택했다.
이러한 자막 확대는 정책적으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2023년 '한글자막 필수' 요구를 수용해 신작 영화 지원을 확대한 이후, 자막 상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관람 환경 조성이라는 정책적 의미를 갖는 확대 흐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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