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산업·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 총수 역할, 경제 외교로 확대
한미 관세 타결 결정적 역할…李대통령 "정부·기업 합 맞아"
이재명 대통령이 10월 31일 APEC 정상회의 장소인 경북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접견에 앞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해진 네이버 의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이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뉴시스
이재명 정부 들어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의 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모양새다. 통상적 경영 활동은 물론 정부와의 직접 소통, 해외 외교전까지 총수들이 직접 챙기는 영역이 확장되면서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그룹 총수들은 올해 들어 해외 출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화하며 글로벌 네트워크 확장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각국 정부 관계자와의 면담, 현지 투자 가능성 검토, 협력기업 경영진과의 미팅 등 외교적 역할에 가까운 활동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공급망 재편, 기술 패권 경쟁, 에너지 전환 등 글로벌 경영 환경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기업들이 적시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대표적 사례는 최근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이다. 한미 관세는 미국이 올 4월 수입차에 25% 관세를 부과한 뒤 7개월 만에 협상이 마무리됐으며, 후속 협의에 돌입한 지 92일 만인 지난달 29일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는 물론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이 지난 8월 이재명 대통령 취임 이후 첫 한미 정상회담의 경제사절단으로 참여, 대규모 대미 투자 계획을 제시하며 정부에 힘을 보탰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오스틴과 테일러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데 이어 테일러에 2030년까지 총 370억 달러(약 54조원) 이상을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SK그룹은 배터리, 반도체, 친환경 분야에 5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한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9억 달러(5조6000억원)를 투입해 첨단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향후 4년간 26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냈으며, LG그룹도 애리조나와 미시간·테네시 등에 배터리 완제품과 소재 공장을 건설 중이다.
한·미 조선업 협력의 상징 '마스가(MASGA)' 프로젝트의 주역인 한화그룹은 미국 필리조선소 생산 능력을 10배 이상 확대하기 위해 50억 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HD현대도 미국 조선소 현대화와 공급망을 강화하고, 자율 항해 등에 50억 달러 투자를 결정했다.
특히 지난 10월 18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웨스트팜비치 트럼프 인터내셔널 골프 클럽'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총수들의 골프 회동은 관세 협상 타결의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당시 총수들은 관세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각 그룹의 대미 투자 현황을 설명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조선업 협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도 전날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 협상 후속 관련 민관 합동회의에서 "정부와 기업이 함께 움직이며 예상하지 못한 성과, 방어를 아주 잘 해낸 것 같다"며 "정부와 기업이 이 정도로 합이 맞아 공동 대응한 사례는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대통령실에서 주요 그룹 총수들을 만난 건 이날이 세 번째다. 이 대통령 취임 직후인 6월 13일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둔 8월 19일 총수들을 대통령실로 초청해 투자 계획과 공급망 대응 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이날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 정의선 회장, 구광모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등은 향후 5년간 1260조원이 넘는 초대형 투자 계획, 최소 17만명에 달하는 고용 계획을 발표하며 미뤄둔 투자 계획에 플러스알파(α)를 더한 '선물 보따리'를 내놨다.
10월 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써밋에서 참석자들이 박수치고 있다. 왼쪽부터 이형희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정기선 HD현대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의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장인화 포스코홀딩스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뉴시스
총수들의 국내 일정도 숨가쁘다. 정부와의 정책 협의, 신사업 추진, 조직 재정비 등 총수들이 직접 챙겨야 하는 현안이 산적해 있다. 반도체·배터리·AI 등 국가 전략산업이 정부 정책과 긴밀히 맞물리면서, 총수들의 활동 영역이 사실상 경제 외교의 연장선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재용 회장과 정의선 회장, 김동관 부회장은 오는 19일 이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국빈 방문을 계기로 한국경제인협회와 코트라가 주최하는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행사에 참석해 국방·방산·에너지 협력에 더해 AI 등 첨단 기술 분야 협력 확대를 논의할 예정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총수들은 단순한 기업 경영자를 넘어 투자·외교·정책 대응까지 역할이 크게 넓어지고 있다"며 "이런 다층적 역할이 앞으로는 기업 경쟁력의 한 축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